반야심경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요즘 선준이는 밤마다 반야심경을 외웁니다.
심리적 평안을 위해 엄마가 띄워놓은 BGM을
아이는 유행가처럼 따라 부릅니다.
아이의 입술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오물거릴 때
제 마음은
속수무책이 됩니다.
분명 이 우주는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일 겁니다.
내 아이가 들려주는 진언을 믿을 수 밖에요.
반야심경 260자를 지나, 수행문과 참회문까지 건너면
담백한 목탁 소리가 이어지고
엄마의 마음 속 참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잠이 둡니다.
엄마는 두려움이 있어?
‘여래는 두려움이 없다’고 한 말이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선준이가 엄마의 두려움을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을 괴롭힐 수 있습니까?'를 묻는 아이의 눈이 너무도 순수해서 한참을 바라봅니다.
3살 무렵부터 죽음을 두려워했던 선준이는,
8살이 된 지금도
자신이 나무만큼 살 수 있는지
엄마는 언제 죽을지를 궁금해합니다.
선준이는 알까요.
엄마는 자신의 죽음이 별로 두렵지 않고,
그 누구의 수명도 별로 궁금하지 않다는 것을요.
엄마의 두려움은 오직
선준이의 죽음뿐입니다.
나무만큼 오래 살고 싶은 선준이가
어떤 일로든 엄마보다 먼저 생을 달리한다면
도저히 담담할 자신이 없으니까요.
사실 수행자라고 한다면
그게 그 누구이든
심지어 자신의 아이라도 해도
인연에 따라 지어지는 대로
생과 사에 초연해야 할 것으로 생각은 됩니다.
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을 되풀이해 생각하는 것도 문제입니다만,
마음속 테스트가 영 끝날 것 같지가 않습니다.
해탈은 멀었고, 반야는 미지근합니다.
유독 내 아이만을 콕 집어
그의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건
제가 아이에게 집착되어 있다는 뜻이겠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이 문제를 곱씹어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준이는 또 다른 나다.
나는 내 자신을 속이고 있다.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다.
나는 나의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두려운 거구나.
나의 분신인 아이의 죽음이 두렵다는 건
곧,
죽음이 두렵다는 뜻이구나.
저는 평생 자기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는 걸까요.
속고 속이는 게임이 끝나는 순간
열반에 이를 수 있을까요.
오늘도 부고 한 장을 받았습니다.
부고장에 굳이 꼬리표를 붙이자면 '업무상 관계'입니다.
강릉에 살고 있는 저는 결혼식도 장례식도 돈만 보낸 지 꽤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을 '손절'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사실 별 상관없다고 생각해 왔는데...
장례식장에 가지 않아도 될까가 고민되는 걸 보니
사회적 손절도 두렵기는 한 모양입니다.
과연 이 모든 걸 건너가게 될 그날이 올까요.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건너, 자기 자신마저 넘어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