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사유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완숙해진다.
사랑을 흥분상태로 정의한다면 이제는 그것을 관측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실시간으로 관측할 방법도 없고, 그 정확도가 떨어진다. 그런데 인류는 아직 사랑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내리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사랑이라는 단어의 뒤에는 항상 '또는 그런 일'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사랑이라는 명제를 어떤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며 소중히 대하고 즐기는 것 또는 타자를 이해하고 돕고 싶은 마음(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사랑은 문장으로 정의 내리기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연인이든 부부든 관계없이 유통기한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유통기한에 접목되는 사랑은 육체적인 관계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 호르몬 분비로 인해 생기는 착란이라고 보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부부가 서로에게 정과 의리를 느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사랑에는 절대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가페적인 사랑이 항상 실패만 하는 것도 아니고, 이기적인 사랑이 항상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젊은 사람들이 유독 사랑에 회의적이고,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는 대체제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이유는 사랑을 정의 내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들은 유튜브 연애학 박사들의 말을 신뢰하다 못해 맹신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맞는 사랑의 방법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그들의 말을 따라서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는다. 그 유튜버들이 말하는 사랑은 단일한 개체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온 소리일 뿐 크게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사랑을 떠나서, 자신의 선택을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자처해서 꼭두각시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 얼굴이 못생겨도, 키가 작아도, 금전적인 여유가 없더라도, 연애를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손에 있는 휴대전화로 연애학 강의 동영상을 볼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야 한다. 보고 들었지만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게 바로 그런 영상들이다. 직접 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을 타인에게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주 주관적인 생각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가족애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던 우리 집에서 나는 어떤 부족함도 느끼지 못했다. 덕분에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스스로 내릴 수 있었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험했다. 이렇듯 사랑은 절대로 긍정과 부정으로 나눌 수 없고, 모든 것을 중용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