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문맹률이 낮은 한국에서 글쓰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그리고 작문 관련 플랫폼이 많아진 지금은 글을 쓸 수 있는 공간도 많아졌다. 당장 브런치 스토리만 해도 하루에 수백 개의 글들이 쏟아진다. 에세이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글은 위로에 관련된 글이며, 서점에서도 행상매대에 진열된 책은 근거는 없지만 당신은 잘될 수 있다는 내용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그것이 나쁜 글이라던가, 낙관이 무조건 부정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책만 찾는 것은 술과 담배에 의존하는 것과 같아서 일시적인 감정 회복에는 도움을 주지만 근본적인 인식 문제는 치료되지 않는다. 그런 글을 읽는 우리의 사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또 가벼운 에세이에 치유와 위로를 받는 이유는 그만큼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고 큰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위로가 먼저가 아니라 인식이 먼저다. 왜 상처를 받는지, 어째서 고통을 느끼는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인생의 목표가 행복인 사람은 불행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목적도 수단도 아닌 그저 기분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인생의 목표가 어떤 기분을 가지고 있는 삶이라면 평생 그 기분을 유지한 삶을 얻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조금 더 구체적이게 어떤 기분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그 기분이 소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삶을 원하며, 그것을 위해 나는 이러한 방법으로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라고 명징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나마 조금 나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오히려 부정적인 기분을 얻어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행복은 아주 사소하고 수동적이며 금방 사라질 기분이고, 반대의 불행은 아주 특별하고 능동적이며 평생을 따라다닐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에 초점을 두기보다 불행하지 않고 싶다는 감정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그것이 특별하고, 능동적인 삶을 추구하는 방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행복 이외의 다른 생산적인 목표를 하나씩 쟁취하며 행복이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수록 원래 원했던 행복이 나타난다. 더 정확히는 목표를 달성할 때마다 행복한 고양감을 잠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행복이라는 집착을 버리면 우리는 진정으로 덜 불행할 수 있다.
낙관과 비관의 중용이 특히 어려운 이유가 있다. 비관적인 생각은 따로 노력을 하지 않아도 밤에 눈만 감으면 미친 듯이 흘러 들어온다. 반면 그것을 막으려 하는 낙관적인 생각은 애써서 비관을 누르려고 힘을 소모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기분을 생각으로 누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관과 비관의 중용은 굳이 부정을 긍정으로 누르려는 시도가 아니다. 어떤 것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낙관과 비관의 중용에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도 하지 않는 기대를 타인에게 하는 경우 분노가 나타난다. 내가 하지 못하는 행동을 타인은 쉽게 하면 질투가 생성된다. 먼저 나와 타인을 명확하게 분리해야 한다. 그것이 중용의 첫걸음이다. 또 복권을 사는 것과 같은 행동에 실망의 모습을 감출 수 없다면 구매하지 않는 것이 좋다. 실망 또한 기대에서 오는 감정이고, 어떤 기대에서 성공을 얻어낸다 해도 우리는 결국 또 실망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실패의 상황을 성공의 어머니라며 아무런 피해 없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사람은 이 글을 읽지 않아도 된다. 이미 중용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니까.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 것 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성공해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개인에게 인생을 너무도 긴 여행길이다. 그 삶이 겨우 기분에 좌우되는 것은 지혜롭지 않은 선택이다.
쓸데없는 것이 휘둘리는 게 싫다면 기대하지 않는 훈련을 매일 해야 한다. 다른 대체 훈련은 사실 어렵기도 하고 책을 읽고서 혼자 실행하는 것은 크게 효과도 없다. 그러나 365일 어떤 상황이든 크게 기대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면 언젠가 중용에 발을 담그고 있는 우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에 평온을 얻고 더 이상 어떤 글에 기대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