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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권 Mar 22. 2024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다

주체적인 삶은 살아가는 사람




    매 순간을 틀린 판단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곰곰이 다시 한번 떠올려야 한다. 그 선택이 완연하게 나만의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타인의 개입이 많았는지를 말이다. 물론 그것이 남 탓이 되어서는 고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나아가 '나는 잘못이 없었다'로 귀결된다면 더 이상 발전도 없을 것이다. 어떤 조언을 참고하는 것과 타인의 의견을 맹신하거나 의존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우리 삶의 위기마다 조력자가 나타날 수는 없다. 극단으로는 평생 조력자나 스승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옆에서 부정만을 떠드는 그 사람은 과연 무엇일까. 조력자도, 스승도 아닌 사람들에게 판단을 넘기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스스로가 독단적으로 내린 결정이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도 그것은 오히려 긍정이 될 수 있다. 내가 한 일은 남 탓을 할 수도 없고, 세상을 욕 할 수도 없다. 그저 정신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자신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일이 처리되었을 때 우리는 한 단계 성장한다.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성장은 스스로 결정했을 때 발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결과가 좋다면 작은 성장을 하고, 결과가 나빠서 수습까지 한다면 오히려 큰 성장을 할 수 있다. 물론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 작은 성장을 반복하는 게 복리의 효과로 보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 눈에는 성공만 하는 사람들이 즐비하지만 사실은 수습하는 사람이 훨씬 많은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실패 후 뒤처리 중이라는 사실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겉 모양새가 좋아 보이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어떤 판단을 할 때 우리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깊어지면 사색이 되고, 깊어진 사색의 시간이 지날수록 고뇌에 가까워진다. 번뇌의 시간이 끝나고 결국 사유를 하게 된다. 판정해야 할 대상이나 시기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계획을 구성한 후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추리하고 판단하는 게 올바른 사유다. 이렇게 여러 번의 사유가 거듭되어야 진정한 완성도와 독립성을 보여주는 올바른 개체로서 진화하게 되는 것이다. 세네카는 이러한 한탄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누군가의 말을 믿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선택한 오솔길보다는 남들이 많이 가는 포장된 인도로 걷겠다는 소리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입증된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으나, 그것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면 사실 언젠가는 샛길로 빠질 수밖에 없다. 남들이랑 비슷한 보폭으로 같은 길을 걸으며 뒤처지지 않는 체력을 가졌다면 그 길 또한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보폭이 좁고,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유를 해야 한다. 그들과 같은 길을 가겠다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그 길에서 도태되는 자신을 실시간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제는 자신만의 삶을 개척해야만 한다.


    물론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조력자나 스승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대의 사람들은 조력자와 스승의 조건을 무조건 돈과 권력, 그리고 권위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에 반대되는 말을 하면 사람을 비하하고 직업을 낮잡으며 '그럼 노숙자나, 청소부가 인생의 멘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는 어처구니없는 반문을 한다. 굳이 100억 자산가 대 노숙자를 예로 드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사람은 그렇게 극단적일 필요는 없다. 나를 인도하는 사람이 무조건 100억 자산가이거나 노숙자일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인생의 스승은 책이 될 수도 있고, 부모님 또는 친구가 될 수도 있다. 하다못해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면 그 아이는 우리의 내적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스승은 한 명 이어야 한다거나 반드시 사람이어야 하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자력으로 확보한 근거와 논리로 여러 사람을 설득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무조건 어떤 권위적인 사실로 우리의 판단을 침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자아가 약해진다.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영혼 없는 인간과 같고, 그렇게 된다면 환생을 해도 사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올바른 근거와 논리는 자신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작문으로서 뿜어내는 게 좋다. 그렇게 한평생 써 내려간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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