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플라톤
서평가: 박진권 | 제호: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저자: 플라톤 | 번역: 박문재 | 출판: 현대지성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에 있어서 어떤 감정도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두려움과 섭섭함 그리고 아쉬움과 후회는 무조건 남기 때문이다. 이 모든 감정을 무로 돌리고, 자연스럽게 흙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철학이다. 철학을 공부하고,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을 만들어 낸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이승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생을 대충 사는 것은 아니다. 자기에게 부끄럽지 않게 떳떳하게 치열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마주친 죽음에 당황하지 않고, 덤덤하게 맞이하는 것이다.
죽음 이후의 삶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구도 증명한 적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명한 과학자들도 알 수 없다. 무로 돌아갈지, 윤회를 거듭할지, 천국으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을 어째서 두려워하는 것일까. 알지 못하고 막연하기 때문이다. 미련이 남는 것은 인생을 만족스럽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며 죽음이 왜 두려운지, 왜 미련이 남는지에 대한 개인의 철학을 정립하지 못한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지독한 후회를 안고 눈을 감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죽음에 대한 철학을 어떻게든 정립해야 한다.
평생을 열심히 그리고 힘들게 살아온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물질 만능주의를 탈피하고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만의 시선으로 내면의 만족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은 평온이고, 그 너머는 안식처일 것이다. 어쩌면 세계의 근원을 알 수 있는 곳일 수도 있고, 철학의 상위 개념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일 수도 있다. 죽음 이후는 아무도 모르지만 명확한 사실 하나는 있다. 적어도 이승에서 얻은 것은 저승으로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이다. 돈과, 값비싼 물건 그리고 명예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은 죽음 앞에서 어떤 유효성도 갖출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고, 내면을 단련하는 이유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혼을 위해서다.
보이지 않고,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것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사람이 눈으로 죽음 이후를 볼 수 없다고 해서 죽음이 끝은 아니다. 오히려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고, 어떤 고차원적인 개념으로서는 죽음도 끝이 아닐 수도 있다. 즉 사람이 살아가는 이승은 게임으로 치면 100탄 중 1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이렇듯 증명되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에 막연하게 두려움만 느끼는 것은 아쉽다. 현실을 착실하게 살아내며 죽음 이후를 기대한 채 살아간다면 두려움은 미약해질 것이다. 후회 또한 다르지 않다. 삶을 살아가며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할수록 후회와 미련이 남는다. 우선순위를 아주 좁고 깊게 정해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닌 삶에 만족이 있을 리 만무하다.
소크라테스처럼 아주 좁고 깊은 우선순위를 향해 나아가며 죽음에 대한 자기 철학을 정립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할 수 없다.
철학에 제대로 헌신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죽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죽기만을 바라지.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네. 그런데 평생에 걸쳐 오로지 죽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기꺼이 죽고자 해왔던 바로 그런 사람이 오랫동안 고대해 왔던 죽음을 앞두고서 죽기를 싫어하고 그 죽음을 꺼린다는 것이 말이 되겠는가.”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플라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