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후의 ‘섬광감정’(2018). 최지인의 ‘파수’ 속 구절 “감당할 수 없는 일이 감당할 수 있는 일보다 많아서 모두 우스꽝스럽고”를 읽다 보면, 정태후 작가 작품에 그려진 주인공이 떠오른다. 그는 웃고 떠드는 명랑하고 즐거운 낮이 지나가고 밤이 오면, 이상할 정도로 낯선 감성에 푹 빠져드는 청춘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누군가의 뒤척거림을 온몸으로 밀어내는 출근길 지하철 안이다. 누군가 내리면서 생긴 빈자리가 보인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엉덩이부터 밀어 넣은 뒤 가방 안에서 한 권의 시집을 꺼낸다. 어색함에 주변을 둘러보지만, 시집을 펼치고 있는 사람은 없다. 고백하건대, 시집을 자주 읽는 건 아니다. 그런데 괜스레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빠르고 복잡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슬로모션이 걸린 듯 활자와 함께 리듬을 타고 싶은 날. 그때가 바로 시집을 펼쳐야 하는 시간이다.
더디 흐르는 에디터만의 아침 시간, 마음속에 감치고 잊히지 않는 올해의 시집 세 권이 있다. 개인적 감상평으로 소개하자면, 모든 것에 시가 있다는 것을 과감하고 전위적인 작법으로 보여주는 <디 에센셜: 김수영>(민음사 펴냄)은 “겉으로는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개인일지라도 이들이 모이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라는 메시지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타임라인에 존재하는 김수영 다이제스트다. 다음으로, 얼마 전 ‘제40회 신동엽문학상’을 받은 최지인의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펴냄)는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왔을 때, 그러니까 나의 모든 신경이 암연에 침잠할 때 불시에 찾아오는 삶의 고뇌를 날것 냄새나도록 그려낸 것이 인상적이다. 마지막으로 “현실에 완벽하게 투항했는데, 무릎 꿇고 빌고 있는 주제에 도가니와 손모가지의 멋진 각도를 계산한다”라며 시 쓰는 행위를 자조와 후회로 풀어낸 서효인의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문학동네 펴냄)는 보통의 사랑을 받고 싶어 스스로 용납되지 않는, 사랑받지 못할 짓만 했던 예전의 내가 떠올라 등골이 사늘해지는 경험을 하게 만든 시집이다.
이세준의 ‘이미지를 고르는 시간’(2019).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인물의 표정이 네가 어떤 이미지를 선택하더라도 나는 너의 실체를 안다고 말하는 듯하다. 서효인은 ‘로맨스’에서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안 그런 척하는데 나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나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고”라고 표현하는데, 그림 속 주인공과 비슷한 감정 같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안 읽어요.” 출판 문화를 주제로 하는 글의 클리셰다. 하지만 서점에 갈 때마다 의아했던 점은 시집 인기가 잔잔하게 지속 중이라는 것. 출간 2주 만에 1만 부를 돌파한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가 대표적인 예다. 작금의 의아한(?) 상황과 관련해 민음사의 김화진·박혜진 편집자는 “신인의 첫 시집이라 해도 초판(2000부)을 모두 소진하는 일이 잦아요”라고 말한다. 문학동네 김영수 편집자는 “전 세계적으로 시는 매우 마이너한 장르예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시를 읽는 독자가 비교적 많습니다. 드물지만 20만 부 이상 팔리는 시집이 있을 정도로요. ‘문학동네시인선’의 경우 거의 모든 시집이 중쇄를 찍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앞서 감상평에서 말했듯이 최근의 시는 현실적이다. 지친 나날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달보드레한 사랑을 속삭이고, 마음을 챙기는 시가 여전히 크게 사랑받고 있지만, 베스트셀러 목록에선 나와 시인 삶의 무게가 다르지 않음을 체감하는 시집이 왕왕 발견된다. 여기서 느끼는, 사람들에게 강한 공명을 남기는 시인의 고뇌와 시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일까? 최지인 시인은 대답한다. “글 쓰는 사람이기 전에 시민이에요. 시민으로 존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것. 삶의 무게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삶의 무게를 가슴에 안고 살잖아요. 글쓰기가 현실을 마주할 때, 현실의 것이 글쓰기를 뛰어넘을 때, 그래서 타협하고 말았을 때 비루함을 깨닫곤 해요. 언어에는 한계가 있어요. 시적인 게 있다면 일상의 소소한 면일 뿐이죠.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시적인 태도’입니다. 일상을 재검토하며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것이 시 쓰는 태도와 가깝다고 생각해요.”
NASA 등이 공동 개발한 차세대 우주망원경 ‘제임스 웹’이 용골자리 성운을 촬영했다. 몇 만 년, 아니 몇 억 년 전에 발생한 별들의 빛이 하나의 프레임에 모여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개인일지라도 이들이 모이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라는 김수영 시에서 읽히는 메시지와 닮았다.
시집의 또 다른 인기 비결은 형식의 파괴가 아닐는지. 학교에서 학문적으로 배운 시의 정형과 다른, 산문을 넘나드는 유연함과 연과 연, 행과 행을 엇갈리게 하는 레이아웃이 시선을 잡아끄는 게 사실이다. 나아가 행간에 집중하고자 잠시 호흡을 고르는 데서 기인한 숨 가쁨이 설렘으로 다가오기도. 이에 관해 김영수 편집자는 “현대시가 등장하면서 형식적 자유로움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어요. 근래 들어서는 직접적인 목소리로 드러내기 어려운 내밀한 감정을 시적으로 그려내는 작품이 눈에 띕니다”라고 말한다. 한편, 최지인 시인은 “일상을 하나의 선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요? 한 인간이 마주하는 감정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기쁨과 슬픔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뒤섞인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오늘날의 시는 그 형식과 태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사람들과 거리를 좁히고 있다. 즉 형이상학에서 현실 감각으로 관점을 살짝 옮기고 있는 셈. 그렇다면 이러한 시가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김화진·박혜진 편집자는 “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를 볼 수 있도록 낯선 이미지를 만들어내요. 본 적 없는, 그러나 알 것 같은 감각을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예민한 정신을 시가 주는 듯해요”라고 답한다. 최지인 시인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시가 왜 필요한가는 오래된 화두예요. 저는 문학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직 문학이 뭔지도 모르면서요. 마치 어둠 속에서 헤매는 사람 같은데, 언젠가 이 어둠이 익숙해질 거라고 믿어요. 보이지 않던 순간이 올 거라고. 그날까지 역사와 현실 한가운데서 비루한 나를 들여다보는 걸 멈추지 않을 거예요.” [2022.10]
최근 시집은 타이포그래피, 레이아웃 등이 독특하다. 문학동네 김영수 편집자는 디자인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가독성과 아름다움, 한 방울의 낯섦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