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똑같은 파도가 절대 치지 않듯이,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일
이 글은 이슥한 시간 위에 덩그러니 놓인 나를 위로하는 끄적임이다. 처량함과 처참함으로 그득하던 어느 날, 강은정·배유리·장유진 작가가 <미라클 이브닝> 전시에 필자로 참여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주제는 ‘저녁노을’.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듣자마자 개와 늑대의 시간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경계가 모호해진 시간, 즉 청춘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마주하는 상념에 관한 전시일 것이라고 으레 생각했다.
아뿔싸! 산다는 건 뒤통수를 맞는 일이구나. 세 명의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타성에 젖은 나를 타박했다. 강은정은 소리를 통해 내면의 결핍을 건드린다고 하더니, 머리카락 뭉치에서 부레옥잠 뿌리를 연상한 배유리는 집이란 공간을 무기력하게 부유하는 자기 모습을, 지인의 죽음을 목도한 장유진은 황홀한 빛 앞에서 개안하지 않겠노라는 다짐 아닌 다짐을 표현하겠단다. 중년을 향해 달려가는 동년배로서, 동시에 요즘 개 같은 시간을 보내는 개인으로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작가 노트를 짜깁기할까, 아니면 온갖 이론을 거들먹거려 나의 부끄러움을 활자로 가릴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시청자는 강은정·배유리·장유진 목소리에 공명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첫 문장을 정정하는 편이 낫겠다. 이 글은 황혼에 기댄 채 ‘미라클 모닝’을 그리는 우리 모두의 상서(祥瑞)가 되길 바라는 내적 독백이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 기안84 에피소드를 보다가 문득 <미라클 이브닝> 참여 작가들이 떠올랐다. 간혹 지지리 궁상인 기안84의 몸짓을 제외하고, 40세가 된 인간 본연의 고독과 외로움이 가슴에 박힌 까닭이리라. 「마음이 흔들려서, 마흔인 걸 알았다」, 「마흔 수업」이라는 책이 있을 정도로 40이란 숫자가 주는 뉘앙스는 슬픔인가 보다. 기대와는 다른 남루한 현실, 쇼윈도 갓생 뒤에 찾아오는 허탈함,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초조함, 지근거리에 드리우기 시작한 죽음의 그림자 등등. 언제부턴가 한국식 나이에 0.7을 곱해야 실제 나이라고 하던데, 공식에 대입하면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때가 딱 40대다. 비슷한 맥락으로, 배유리 역시 “마흔이란 길목에서 나의 미래가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든 후 삶에 대한 깊은 심심함 속에서, 그런데도 지리멸렬한 나의 삶에 대해 오히려 담담한 마음이 들었다”라고 토로한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미라클 이브닝> 작가들이 권태와 절망과 허무의 굴레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만 같지는 않다. 각 작업이 흩어져 있을 때는 심연으로 침잠하는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뭉치면 되레 희망의 찬가를 부르려 상호작용하는 모양새다. 먼저, 배유리의 영상은 무기력함과 허망함 사이 그 어디쯤 있어 보인다. 녹색 빛 아래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혹은 체념한 채, 마치 전자레인지 회전판처럼 돌고 있으니까. 뜨거운 추상의 바실리 칸딘스키는 주장한 바 있다. “녹색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부르지 않는다. 움직임이 없는 특성이 영혼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지만, 휴식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쉽게 싫증 날 수 있다”라고. 차가운 추상의 피에트 몬드리안 또한 녹색을 멀리했는데, 그의 거리 두기는 자연의 무질서함이 주는 불쾌함에서 기인한다. 이를 바탕으로 하면, 배유리 영상 속 녹색은 가슴에 내재한 불안정함이 승화된 결과물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배유리의 작업은 실존주의 철학의 ‘피투성(被投性)’과 닮았다. 피투성은 ‘우리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임을 지칭한다. 인간이 수동적인 존재임을 상정하는 셈. 반면, 피투성에서 한 발 나아간 개념도 있다. 바로 ‘나는 왜 여기에 내던져져 있는지’에 일종의 반기를 드는, 다시 말해 나의 선택에 초점을 두는 ‘기투성(企投性)’. 이쯤에서 전시장을 울리는 사운드에 귀 기울여 보시라. 강한 기세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러한 강은정 작업의 특징은 저음에서 출발해 점점 세탁기 드럼이 회전하는 듯한, 자동차 엔진 출력을 높이는 듯한 소리가 나오다가, 날카로운 파열음으로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것.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파동이 배유리 주변을 감도는 불확실성을 상쇄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시퀀스는 ‘기-승-전’에 도달한 뒤 페이드아웃 되는 느낌인데, 여기서 사라진 ‘결’을 이어받는 건 장유진의 사진 작업이다. 앞서 장유진은 무언가를 회피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고 언급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진 구성에선 꺾여도 맞닥뜨리겠다는 마음이 읽힌다. 사진이 촬영된 시간대가 대동소이함에도 관람 동선을 시계 방향으로 하든 그 반대로 하든, 사진 속 주인공이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든 어딘가를 지시하든,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석양을 넘어서겠다는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 이는 정녕 자의적 해석만은 아닐 테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은 고백한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 ‘나는 어떤 인간이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데, 뭘 갖는 건지도 모르겠고. (…)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비록 화두를 제시하는 목적으로 숫자 40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모진 풍파를 겪는 존재가 오직 40대뿐이랴.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데, 70을 향해 가는 나의 엄마는 여전히 인생의 정답을 모르겠다고 한다. 바다에 똑같은 파도가 절대 치지 않듯이,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일이고, 그렇게 운명의 수레바퀴 안에서 매번 살아가는 법을 새로이 배우는 거라는 말과 함께. 그래, 미약할지라도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좋아질 거라고 믿어야지. 감히 강은정·배유리·장유진 개개인이 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겠지만, <미라클 이브닝>이 보여준 것과 같이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는 내력을 구축하기를, 그래서 또다시 희망의 찬가를 불러주기를 작가들에게 부탁한다. 더불어 상서가 되길 바랐던 글쓰기가 지금을 견디는 나에게 해방과 동력을 가져다준 것처럼, <미라클 이브닝>이 ‘미라클 모닝’을 맞이하고픈 모두에게 기점이 되기를 빌어본다. [20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