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무조건 떠나야 했다.
여행 전과 여행 후, 표면적으로는 다른 게 없으며, 같은 일을 하고 있고, 여전히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돈이 많고 여유가 있어서 ‘놀자!’ 외치며 떠난 것은 아니다. 일로 꽉 찬 삶과, 답답한 좁은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들. 일에도 사람에도 지친 우리는 결국 끈을 놓는 순간이 왔다.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약 8개월에 걸쳐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왔다.
우리는 둘 다 괜찮은 월급을 받고 있었지만, 돈을 떠나서 일의 특성과 시기상 정신적으로 힘든 순간들이 쌓여갔다. 월급이라는 약을 한 달 주기로 맞아가며 노동을 이어 갈 뿐이었다. 내 삶이 이게 맞는가 하는 저기 깊은 곳의 마음이 일단은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일본의 '프리터족' (정규직보다는 아르바이트로 최소한만 벌면서 산다는)을 뉴스에서 보면 진심으로 이해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이유를 근거와 핑계로 삼아, 마음속에 이미 있던 정답인 '지구 한 바퀴'를 맞추어 가기 시작했다. 마음먹기는 한순간이었다. 사실 언제나 마음은 먹어져 있었지. 당연하듯 주 5일을 출근하는 우리에게는 너무 과분했던 여행이기에, 그저 확실한 명분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8개월의 글로벌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신비로운 곳을 떠도는 것이 아닌, ‘관광’보다는 ‘잠시 살기’를 착착 이어 나갔다.
각 거점에서 한 달 전후로 숙소를 마련해서 한국에서의 백수와 다를 것 없는 시간을 보냈다. 집 근처 동네를 매일 돌아다니고, 마트에서 장 봐서 밥 해 먹고 운동하고 공부하다가 가끔은 멀리 놀러 가고. 이전에는 늘 체력의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여행을 좋아했지만, 이번 장기 여행은 완전히 다른 포커스로 출발했다.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들은 과하지 않게 설정하고, 새로운 곳에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잠시나마 경험해 보고 오기로 했다.
길었던 여행은 귀국 후 일상에 복귀한 뒤 점점 더 그립고 진한 기억이 되고,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되뇌어 보는 내 하루의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집 한편에 여행의 사진이 계속 반복되는 포토앨범 모니터를 마련했다. 여행 내내 찍어온 수많은 사진이 랜덤으로 계속 재생된다. 서서히 흐려져 가는 기억을 사진이 복습시켜 주어서, 행복했던 시간을 잊지 않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돌아온 현실의 단조로움을 달래준다.
하지만 언제까지 영원한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계속 흐려져 가는 기억 속에서, 포토앨범을 만들며 다행히 한 번의 심층 복습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난 지금, 기억 일부는 사라졌겠지만, 많은 부분은 더 진하게 새겨져 마음을 계속 그곳으로 이끈다. 나는 한국에서 똑같이 일하며 살고 있지만, 언젠가 또 이런 멋진 시간이 있을 것이기에, 마음 일부만큼은 여기 있지 않고 세상 어딘가를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똑같은 하루를 사는 마음가짐이 이전과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고, 이게 이 여행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여행을 다시 한번 복기하며 글을 남기기로 했다. 나중에 더 늙은 우리가 일기장 같은 이 글을 보며 조금이라도 그 시간을 되살릴 수 있길 바란다. 또 이 글을 보는 누군가에게 내가 꿈꾸고 실행했던 그 시간의 행복이 조금이라도 전달되거나, 혹은 그에게 새로운 두근거림을 만들어낸다면 그것 역시 너무나 가치 있는 일이지 싶다.
복기한다는 것만으로도 또 설렌다. 과감했고 조금 더 젊었던 우리를 돌아보며, 한 편씩 일기처럼, 그때의 우리를 따라 다시 한번 지구를 돌아보려 한다.
각 지역의 사진들을 예습했으니, 먼저 오키나와로 떠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