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9 to 6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나하면둘 Jun 22. 2021

점심시간

매우 짧고 소중한

매번 일요일 저녁이 돌아오면 드는 생각이 있다. 혹시 내일 어떤 천재지변님(여름이면 폭염이나 겨울이면 폭설)께서 내려오셔서 어떻게 내일 출근을 좀 안하게 되는 방법은 없을까. 그게 안된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회사 건물이 조금쯤은 기울어서 전체의 보수공사가 필요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하곤 한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그런 일은 당연하게도 일어나지 않기 마련이고 그런 내 바람을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내 그런 생각은 집어 치운다. 그건 출근(혹은 등교)이 시작되었던 초등학교 입학 이래 아마 단 한번 정도(고등학교 때 폭설로 하루 휴교를 했던 기억이 있다) 이루어졌을 뿐이었던 꿈이다. 요사이는 그런 말같지도 않은 희망은 집어 치우고, 좀 더 주도적인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내일 회사를 가는 것이 아니다. 내일 나는 회사 근처에 먹고 싶은 점심 메뉴가 있고, 그럼 그저 점심을 먹으러 가는 김에 회사에서 일 정도는 약간의 서비스로 해주겠다는 식으로.


우스갯소리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사실 전혀 틀린말은 아닌 듯 하다. 점심시간은 싫은 일, 싫은 것 투성이인 회사에서 유일하게 변함없이 좋은 단 하나다. 고등학교 때는 매 교시가 끝날 때마다 쉬는 시간이 있어 점심이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고, 대학생 때 점심은 그저 한끼를 떼우는 번거로운 일에 지나지 않았다. 미련하게도 나는 이제야 점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세 끼니를 챙겨먹게 된 것은 회사생활의 고단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오늘은 그런 행복한 점심시간에 대해서 리뷰를 해보고자 한다. 


1) 점심시간과 구내식당의 부재

회사생활에 관한 우선, 우리 회사의 인사 행정과 복지는 유달리 쪼잔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지만 점심시간만큼은 나름 1시간 20분으로 꽤 넉넉히 준다. 보통 깐깐하게 점심시간을 지키는 회사가 12시~1시까지 1시간을 주는 것에 비하면 점심시간만큼은 인심이 꽤 후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 우리 회사는 별도로 구내식당이 없다. 예전에는 있었다고 들었는데, 워낙 맛이 좋지 않아 직원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없어졌다고 한다. 소문으로 들은 이유는 그 정도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아마 특별히 맛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고 두가지 이유 추정한다.


우선 첫번째는, 맛이 없었다기보다는 점심시간에까지 상사의 얼굴을 마주해야하는 직원들의 입맛이 떨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현재 구내식당의 빈터를 보았을 때 직원 수에 비해 넉넉한 넓이는 아닌 것으로 보아 꽤나 합리적인 추론으로 보인다. 또, 두번째는 아마 구내식당이 각종 소문의 용광로가 되어 부하직원들의 기피장소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우리 회사는 사내 소문의 전파력만큼은 글로벌 수준이라는 평가를 내부에서 받고 있는데, 이는 500명이 채 안되는 회사의 규모 덕분이다. 여간 이 정도 인원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아랫 직원 입장에서 식사 내내 작두를 타는 일이나 다름없다. 자칫 말실수라도 하는 순간, 몇개월을 고통받게 될지, 몇년을 고통받게 될지 모를 치명상을 입게되는 것이다.


뭐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구내식당이 없음에 큰 불만은 없는 편이다. 매일 메뉴를 떠올려야 한다는 점이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회사생활 속에서 그나마 내 취향껏 뭔가를 고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은 꽤나 나쁘지 않은 일이다. 


2) 메뉴 선정

황동규 시인은 시 '즐거운 편지'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꼭 만나는 일 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시간마저 즐거울 수 있음을 역설한다. 마찬가지로 내게 점심시간의 행복은 회사 점심시간 시작인 11시 40분이 아니라, 메뉴를 고민하는 10시 즈음부터 시작된다. 다만, 팀식으로 팀원들과 함께 먹는 날에는 이런 메뉴 선정은 정말 고통스럽다. 보통 회식 장소의 후보군을 정하는 것은 팀의 막내 몫인데, 이는 그 사람의 센스를 평가하는 장이 되곤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까다롭게 굴거면 그냥 각자 먹는게 어떨까 싶긴하다.


여간, 우리 회사는 여의도나 광화문같은 직장밀집지역이 아닌 관계로 걸어서 나가는 주변에 선택지가 다양한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직장가에선 흔하디 흔한 제육볶음/김치찌개 맛집도 하나 없을 정도로 황량한 편이다. 하지만 회사에는 기이한 장점이 하나 있다. 차를 타고 10분 이내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범위를 좀 넓힌다면 선택지가 꽤나 많아진다는 것이다. 대구에서는 맛집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있는 동네도 주변이고, 신세계 백화점도 있으며, 주변에 대학가도 그리 멀지 않다. 물론 매일 차를 타고 나가기는 피곤한 일이지만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는 생각해볼만하다. 나는 요즘은 매일같이 메뉴를 고르는 게 귀찮아져서 그냥 쿠팡에서 파는 냉동도시락을 사놓고, 그날그날 땡기는 게 있으면 먹고 아님 말고 하는 식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회사에서 딱히 점심값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점심약속

점심약속에는 대개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점심약속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혼자 쉬는 시간이나 자기계발 시간을 좀 가지고 싶은 경우일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은 좀 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거나/회사생활에 좀 더 야욕이 있는 경우일 것이다. 이런 저런 사람들을 알아둬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나같은 경우는 점심약속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에 가깝다. 물론 한참 까마득한 상사와의 점심은 싫지만,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꽤나 재미있는 일이다. 점심시간은 그런 식으로 가볍게 만나기에 매우 효율적인 시간이다.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지 않는가. 회사란 곳도 결국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기에, 이런저런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것도 재미있다. 또 모르는 사람이라 한들 한시간 남짓의 한정된 시간안에 만나는 것이기에 별다른 리스크도 없는 편이다. 예전에 직장가가 모여있는 곳에서는 점심시간을 활용해 소개팅을 하기도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도 꽤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그다지 할말이 없을 줄 알았는데 쓰다보니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다. 어쩌면 세상에 존재하는 회사의 수만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수만큼 점심시간의 양태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모든 직장인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오늘도 멋진 점심을 마치고, 맛있는 커피를 한잔 사들고는 날씨가 좋아 오후 반차를 쓸까말까 고민하다 쓰지 않았다. 대신 나는 그냥 내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내일이면 또다시, 점심은 찾아올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