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와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햇빛과 따뜻함이 비버리 마을 전역에 깔려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나는 이곳, 영국 코츠월드의 비버리 마을에서 그 해 첫 봄을 느꼈다.
어딜 걸어도 동화 같았다. 타샤 튜더의 정원 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기념품 가게 앞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 위에는 오리 가족이 평화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이곳에서는 빨리 걷지 않았다. 사람들은 귀한 햇살을 느끼고, 빛에 반짝이는 초록 잎을 쳐다보고, 바람 아래에서 조용히 땀을 식혔다. 비버리는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제일 손해를 보는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나와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삶의 기준도, 가치관도 다를 것이다. 내가 평생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게,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나는 잊고 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구석구석 천천히 마을을 구경하며 다니다 한 카페를 발견했다. 단순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소품 하나하나 취향이 묻어 있는 가게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용기를 내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대화를 나누던 노부부가 나를 반겨주었다. 가게에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그게 다행이면서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편한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켰다. 잠시 뒤 마요네즈와 계란, 샐러드, 햄을 섞어 만든 홈메이드 샌드위치와 커피가 나왔다. 예상 가능한 단순한 맛이었지만 아까 전 먹었던 샌드위치가 워낙 최악이었던지라 이 익숙한 맛이 감격스러웠다.
이 카페가 추억으로 기억될 정도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낸 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비버리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을을 구경했다.
특별한 체험을 하지 않아도 마을이 풍기는 이미지만으로도 좋은 기억이 되어주는 곳이었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버린 탓에 주택 입구마다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는 출입금지 표지판은 조금 씁쓸했다.
비버리 마을 구경을 마치고 이제 버튼 온 더 워터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미리 찾아 놓은 버스 시간에 맞춰 정류장으로 향했다. 시간이 조금 촉박하긴 하지만, 그래도 잠깐은 구경할 수 있을 듯했다.
정류장에서 비버리 마을에서 느낀 것들을 일기장에 적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30분이 넘게 흘렀다. 와야 할 버스는 오지 않았고, 괜스레 불안하게 반대 방향 버스들만 오지게 지나갔다. 나는 직감적으로 버튼 온 더 워터로 향하는 버스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카페에서 마신 카페인이 강했던 탓일까?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피로로 사고가 마비되어 버렸던 걸까?
그 상황에서 나는 어째서인지 버튼 온 더 워터까지 걸어가야겠다는 결심을 해버렸다. 아마 운전으로 20분 거리였던 것을 걸어서 20분으로 잘못 기억했던 거 같다. 핸드폰 인터넷만 됐어도 그런 바보 같은 결심을 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구글맵 기준으로 걸어서 3시간 46분, 11.4마일을 20분 만에 독파하겠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려버린 것이다.
걸어서 한 20분 정도까지는 여유로웠던 거 같다. 아직 마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였고, 간간히 집들도 보였으니까. 아~ 이렇게 띄엄띄엄 놓인 집들로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나 보다~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했다. 중간에 학교와 교회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도 내 행복 회로에 한몫해주었다.
40분쯤 되었을 때,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매의 눈으로 살펴봐도 눈에 건물 하나 걸리지 않았다. 광활한 초원과, 초원과, 초원이 내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중간에 정류장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탈 생각으로 버스 노선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정류장도,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길을 한국에서 온 이방인 하나가 활기 치며 헤매고 있었다.
힘들 때 웃는 사람이 일류라고 했던가. 나는 허허실실 헛웃음을 지으며 초등학생 때 읽었던 사막에서 살아남기 책을 떠올렸다. 그리고 초원에 흩어진 건초가 밤에 나의 체온을 얼마나 유지시켜줄 수 있을지 가늠했다. 영국에 야생동물이 뭐가 있더라… 얘네도 멧돼지 나오나…?
그때 저 멀리서 붉은색 승용차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 시간 만에 보는 사람이었다.
‘히치하이킹을 해야 하나? 근데 어른들이 모르는 사람 차 타면 안 된다고 했는데. 차가 오는 걸 보니 혹시 좀 더 걸으면 마을이 있는 게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며 머뭇거리는 동안 그 차는 내 옆을 쌩하니 지나갔다. 나는 한숨을 쉬며 판단력을 자책했다. 그리고 버튼 온 더 워터까지 걸어갈 운명인가 보다, 하고 내 선택의 결과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운명에게 미루었다.
그러나 정말 운명은 존재했던 걸까?
방금 전 내 옆을 스쳐 지나간 붉은색 승용차가 스멀스멀 후진으로 다가와 내 옆에 멈춰 셨다. 운전석의 창문이 스르르 열리고 젊은 남자가 걱정 어린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Are you ok?”
그렇다. 나는 버튼 온 더 워터에 갈 운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슬램덩크의 정대만이 안선생님에게 농구가 하고 싶다고 말하던 순간처럼, 간절한 얼굴로 그에게 대답했다.
“…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