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된 자본으로 무기한의 여행을 떠날 때 좋은 점은 포기하는 법을 배울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조식에서 제공해주는 식빵을 멍하니 씹으며 지난밤, 코츠월드에서 짚더미를 깔고 길바닥에서 노숙할 뻔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주의력 깊은 청년의 도움으로 허허벌판에서 버스정류장까지 차를 얻어 타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낙오를 면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곧 틀어진 계획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오늘 가지 못 한 보튼 온 더 워터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하루 또 날 잡고 아침 일찍 일어나, 버스를 갈아타고, 이른 막차 시간에 맞춰 움직이고 하는 짓을 반복해야 했다.
생각만 해도 피곤했다. 편하려고 하는 여행은 아니지만 계획 없는 여행에서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일 필요가 있을까? 아득바득 다시 방문해서 보튼 온 더 워터를 보게 된다면, 같은 짓을 반복했다는 피곤함과 아름다운 마을의 기억이 뒤섞여 버릴 거 같았다.
나는 버튼 온 더 워터를 이번 여행에서 깔끔하게 포기했다. 아니, 코츠월드에 한 번 더 방문하기 위해 ‘남겨 두었다’. 오늘의 내가 마치지 못 한 여행을 미래의 내가 마무리 지어줄 거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사라졌다. 코츠월드에 한 번 더 방문해야 할 이유를 만들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런던행 버스에 올라탔다.
자기 합리화는 때론 현명함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오늘은 하루 종일 런던에 있을 예정이었다. 런던아이와 패키지로 구매한 런던 던전 티켓이 남아 있었다.
런던 던전은 런던아이 맞은편에 있는 공포체험 관광지다. 1000년 전, 실제로 런던에서 일어났던 유명한 살인사건들을 테마파크처럼 꾸며 놓고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야기를 들으며 이동한다. 한국으로 치면 귀신의 집 같은 곳이다.
별로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다. 나도 오기 전에는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미취학 아동 때부터 착실하게 성장해 온 뼈오타쿠였다. 나 같은 성실한 오타쿠는 런던 던전 앞에서 중세시대 복장을 한 여성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법이다. 거기다 과몰입 연기까지 하면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그냥 코 꿰여 버리는 거다.
런던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느끼긴 했다. 어린이용 어트랙션에 내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구나. 실내는 콘셉트에 맞춰 잘 꾸며져 있긴 했지만 의도적으로 ‘세트장’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이용객도 대부분 보호자와 어린아이들이었다. 구경하는 재미는 있지만 기대와 달리 시시하다는 감상을 갖기 시작할 때쯤, 런던 던전의 ‘진짜 공포’가 시작됐다.
몰입과 재미를 위해 직원들이 관객을 연극에 ‘참여’시키기 시작했다. 마치 마술쇼에서 관객에게 카드를 골라달라고 하듯이 말이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이곳은 영국이고 당연하게 연극은 영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뭣도 모르고 앞줄에 앉아 적극적으로 배우들에게 호응을 해주고 있었단 거다.
내 옆의 아이가 배우의 손에 붙잡혀 법정처럼 꾸며진 무대 위에 섰을 때, 나는 마치 범행을 들켜 버린 피의자처럼 동공이 흔들렸다.
‘이거 까딱하다가는 20년짜리 이불킥 추억이다.’
어른이란 자고로 아이를 위해 양보할 줄 아는 미덕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나는 입장 순서상 불가피하게 차지하게 된 모든 앞자리를 아이들에게 양보하기 시작했다. 서투른 영어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며 이번에도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런던 전전의 마지막 코스는 교수형 체험이었다. 말이 무섭긴 한데 진짜 목을 매단다는 건 아니고, 자이로드롭 같은 놀이기구에 태워서 훅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거였다.
내 옆자리에는 이 어린이용 놀이기구를 한껏 무시하던 아저씨가 앉았다. 아저씨는 내게 너무 겁먹지 말라며, 사진이 찍히는 카메라의 위치를 가리켰다. 출구에서 네 놀란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며. 나는 이 영국 아저씨의 오지랖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사회성을 조금 끄집어내어 대꾸했다.
“아…ㅎ…네…”
자이로드롭이라고 해서 놀이공원처럼 몇 번씩이나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긴 교수형 밧줄이 용수철도 아니니까.
출구 쪽에는 오지라퍼 아저씨 말대로 놀이기구에서 찍힌 사진이 후룸라이드처럼 화면에 쭈르륵 띄워져 있었다. 나는 내가 찍힌 사진을 찾았다. 당연히 내 옆에는 아저씨도 있었다.
“풋.”
나는 아까 전 주머니에서 끄집어낸 사회성을 저 멀리 빅벤까지 던져버렸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의 비웃음을 지었다.
나의 카메라 짝꿍은 아마 아저씨였던 듯하다. 사진 속에는 나와 아저씨가 가장 크게 찍혀 있었는데, 즐겁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나와 반대로 아저씨는 고개를 숙이고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고함을 지르고 있는 얼굴이었다.
아저씨도 자신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단 걸 몰랐나 보다. 외국인 여자애한테 한껏 허세를 부리던 몇 분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참 마뜩잖아 보였다.
‘괜찮아요. 아저씨, 그럴 수도 있죠.’
나는 아저씨에 대한 무언의 위로를 담아 한껏 기세 등등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옆을 지나갔다. 아저씨, 덕분에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