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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Oct 14. 2022

이름은 잊었지만 이야기로 남은 친구들


기억이 유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발화될 수도 있단 것은 잊고 지냈다. 이 여행기는 나의 기억과, 그 기억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되고 있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적어 내려갔던 지난날의 빼곡했던 기록들 덕분에 잠들어 있던 과거는 다시금 생기를 되찾아 머릿속에서 활발히 재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그 흔적조차 찾기 힘든 것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친구의 이름 같은 것들. 분명 당시에는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헤어질 때는 SNS까지 교환했었는데도 말이다. 유지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들의 SNS는 사라져 있었고, 당연히 적어 놨을 거라 생각했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사진과 이야기로는 남아있지만, 다시 찾아보기는 힘든 사람이 됐다. 대체로 잘 지내고 있는지, 너희의 기억 속에도 여전히 내가 남아 있는지 궁금해질 때도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인생에 이렇게 흘러간 인연이 수백 개는 될 터. 이번에도 그냥 물처럼 흘려보내보려 한다. 


그러므로 잊힌 두 친구의 이름은 A와 B로 대체하겠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알파벳 친구들이 등장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들이 첫 번째 알파벳을 차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좋은 추억과 의미를 가진다는 걸 이해해주면 좋겠다.




위키드를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해가 져서 그런지 가드들이 숙소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도대체 런던의 밤거리에는 어떤 사람들이 돌아다니길래 이러나 싶은 불안함과 그래도 이곳은 안전하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6인실 도미토리 룸을 신청했었다. 귀가 시간이 늦었으니 분명 룸메이트들이 방 안에 있을 것이었다. 살짝의 긴장감을 가지고 조심히 방문을 열었다. 

4개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그리고 환한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헤이~”


그 인사말 하나에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얘네랑 친구가 되어서 헤어지겠구나. 나도 웃으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하이!”


네 사람은 내가 오기 전부터 이미 대화 중이었던 듯했다. 우리는 각자 자기소개를 했다. 

패션 사진작가인 스테파니, 장기 배낭여행 중인 이그나시오, 미국계 중국인 A, 오스트리아의 대학생 B 그리고 얼레벌레 한국을 떠나온 나.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A는 손을 번쩍 들며 밝은 표정으로 자신이 한국어로 자기소개를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가 한국 드라마 팬이라 한국어를 배웠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나는 짱깨입니다.”


그의 유창한 한국어가 끝나자 방 안에는 오~ 하는 감탄과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A의 자신감 넘치는 외국어 도전기를 칭찬하지 못하고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나는 짱깨입니다.”


칭찬에 힘입어 A가 다시 한번 한국어 실력을 뽐냈다. 자신감을 얻은 A의 발음은 방금 전보다 더 명확해졌다. 그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착잡해졌다.


“어때?”

“… 너 그거 누구한테 배웠어?”

“우리 동네 한국인 아이들이 나 지나갈 때마다 이렇게 부르던데? 짱깨~ 짱깨~ 이러면서.”


어우, 애기들아!

아니, 이건 애기들 잘못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무엇이 인종차별인지 명확하게 교육하지 않은 한국 사회가 문제였다. 미국 땅에서 중국인에게 ‘짱깨’라고 부르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주지 않은 어른들이 문제인 것이다.


나는 고민했다. 지금 네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진실을 알려줘야 할까? 초면부터 이렇게 분위기 냉수마찰 아티스트로 등극해도 되는 걸까? 그냥 좋게 넘어가면… 넘어가면 얘는 다른 한국인 앞에서 또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겠지. 아주 정확한 발언으로.


“… 그거 안 좋은 뜻이야.”

“어?”

“… 짱깨 그거 중국인 비하 단어라고…”

“뭐어어어???”


방 안은 충격과 어이없는 웃음으로 가득 찼다. 다행히 A는 나 외에는 이 한국어 자기소개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뭐랄까. 어린이의 ‘철없는 장난’이라며 넘겨 버렸던 차별 행위가 불러일으킨 나비효과를 본 기분이었다. 나는 A에게 대신 사과했다. A는 괜찮다며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인생이 부정당한 기분이야.”


자신이 평생 동안 믿고 있던 것이 틀린 거란 사실을 깨달은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이 숙소에 있는 바에서는 저녁시간부터 ‘해피아워’라는 이름으로 저렴하게 술을 판매했다. 우리는 다음 날 각자의 여행 일정을 마치고, 시간 맞춰 숙소에 다시 모여 술을 마시기로 했다.


다음 날은 3월 17일, 성 패트릭 데이였다.

숙소 직원들은 모두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고, 바에서는 클로버나 성 패트릭 데이가 써져 있는 헤어밴드를 나눠주고 있었다. 우리는 얻어걸린 축제를 기념하며 헤어밴드를 쓰고 맥주를 마시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 운 좋다. 오늘이 성 패트릭 데이인 거 알고 있었어?”

“아니.”

“아니.”

“난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이따 클럽파티도 예약해 놨는걸.”


모두가 일제히 A를 바라봤다. 당연히 반응한 키워드는 ‘클럽파티’였다.


“클럽파티가 있어?”

“응.”

“다 같이 가자.”

“근데 미리 입장권을 예매해놔야 들어갈 수 있어. 지금은 안 팔 텐데.”

“현장에서 팔 수도 있잖아. 일단 가보자.”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클럽파티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미 거리는 즐거움, 흥분, 술기운으로 일렁였다. 핼러윈 날 이태원에서 풍기는 축제의 분위기가 도시 전체에 깔려 있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이성도 1cm씩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A의 뒤를 따라 우리는 한 클럽에 도착했다. 1층은 술을 파는 스탠딩 바였고, 티켓이 있는 사람들은 2층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A는 2층에 가겠다며 인사를 건네고 계단을 올라갔다. 나를 포함하여 남은 네 사람은 1층 스탠딩 바를 구경했다. 하지만 역시 본 게임은 2층이란 기운을 저버릴 수 없었다.


“올라가자.”


이그나시오가 말했다.


“티켓 없잖아. 앞에서 막힐 걸?”

“아냐. 보니까 티켓이 없는 사람들도 들어가는 거 같아.”

“검사 안 하나?”

“올라가 보면 알겠지. 일단 가보자.”


우리는 반신반의하며 계단에 발을 옮겼다. 그리고 갑자기 미친 듯이 밀려드는 인파에 휩쓸려 인간들 사이에 낀 채로 자연스럽게 라운지 안에 입성하게 됐다. 정말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들어왔다. 들어오고 나서도 이 상황이 황당해서 다들 얼굴을 마주 보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2층은 맥주도 무료, 기념 티셔츠도 무료, 게임도 무료, 전부 무료였다. 우리는 스텝이 쥐어주는 티셔츠를 한 장씩 어깨에 걸치고 맥주를 마시며 비어퐁을 즐겼다. 티켓을 구매해서 입장한 사람들은 모두 손 목에 클럽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초반에는 너무 깨끗한 우리의 손목 때문에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이내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눈치 없이 남의 집 잔치에 숟가락을 올렸다. 


의외로 별 거 없는 클럽에 지루해질 때쯤, 우리는 A를 찾아 놀라게 해주기로 했다. A는 바 근처에 서서 누군가와 대화 중이었다. 


“안녕!”

“어? 뭐야? 너희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무단출입이 계획적이고 악의적인 의도가 아니었음을 최대한 강조하며 우리의 짧은 모험기를 전해줬다. A는 황당한 표정으로 손목의 클럽 팔찌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다 스텝이 패스 검사라도 하면?”


그러자 B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이렇게 하려고 했지. 아~ 패스요, 여기… 어?! 팔찌가 어디 갔지?? 아~ 아무래도 종이라 사람들에 휩쓸려서 뜯어졌나 봐요…”


그녀의 능청스러움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저 정도 순발력과 위기 대처 능력이면 뭘 해도 될 것이다. 



11시가 되자 스텝이 손님들에게 다음 클럽으로 이동하라고 안내했다. 우리도 인파를 따라 다음 클럽으로 걸어갔다. 초록색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에 물결을 이루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도 이렇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이런 문화의 차이와 거기서 오는 색다른 분위기가 타국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새로운 경험을 체험할 수 있어 재미는 있었지만, 그래 봤자 클럽 투어라는 것은 내게 흥미를 잃게 만들기 충분했다. 원래도 클럽을 별로 안 좋아했고, 좁은 클럽에 입장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까지 발견하자 갑작스레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숙소로 돌아왔다. 나에게는 내일 취소할 수 없는 일정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클럽 투어보다 더 기대되는 스케줄이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옥스퍼드에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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