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한한 일이지. 15명과 한 방을 쓰면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많을 것 같은데, 오히려 6인실보다 더 무관심했다. 군중 속의 자유가 이런 걸까?
그래도 역시 16인실은 오버였다. 남들이 나에게 관심이 없을 뿐이지, 나까지 엄마 집 온 딸내미처럼 긴장 풀고 지낼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분실사고가 일어났을 때 용의자가 6명인 것과 15명인 것은 그 난이도가 달랐다.
남은 일정을 생각하면 동선상 숙소는 계속 킹스크로스역 근처에 있는 게 좋았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제너레이터 호스텔’에 남은 런던 일정 전부를 예약했다. 같은 도시 내에서 숙소 예약만 몇 번째인지.
그나마 장점이라면 이제 대충 사진과 리뷰만 봐도 어느 정도 퀄리티의 숙소인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가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제너레이터 호스텔은 지금껏 묵었던 런던의 숙소 중에 가장 깨끗하고 넓었다. 커다란 홀과 공용공간, 저녁에는 펍으로 변하는 바, 안전하게 짐을 맡길 수 있는 락커룸까지.
마지막 날 일어났던 일만 아니었어도, 이곳은 내게 좋은 숙소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해리포터, 셜록홈스도 있지만 영국은 뮤지컬로도 유명한 국가였다. 그중 피카딜리 서커스는 런던의 문화 중심지라 볼 수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날 보러 오라며 수많은 공연 작품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휴학 중 알바로 번 돈의 60%를 연극, 뮤지컬을 보는데 썼던 나로서는 이곳만큼 벅차오르는 거리도 없었다. 다음 방문 때는 피카딜리 근처에 숙소를 잡고 일주일 내내 뮤지컬만 보러 다니는 여행도 좋을 듯싶었다.
한국의 대형 극장 뮤지컬 가격은 사악하기로 유명하다. 뮤지컬 보기를 취미로 삼기 어려운 이유에 관해 여론조사를 해보면 높은 확률로 ‘가격’이 1위를 차지할 거라 확신한다. 예전엔 그래도 비싼 VIP석으로 지정된 자리가 납득이라도 갔지, 요즘은 1층 좌석=VIP석인 것 같다. 심하면 2층 앞열까지 VIP로 잡고 비싼 표값을 받는 공연도 있다. 진심 네고왕에서 한 번 찾아가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반면에 많은 대형 뮤지컬의 본고장 중 하나인 영국의 티켓값은 한국보다 저렴했다. 뿐만 아니라 피카딜리역 근처의 레스터 스퀘어에 위치한 ‘tkts’를 통해 당일 공연의 취소표나 미판매표를 저렴하게 구매할 수도 있었다.
점심시간 전에 방문했음에도 tkts 매표소 앞으로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tkts를 검색했을 때 나온 사진 중에 이렇게 줄이 길었던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는데.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왠지 오늘 원하는 뮤지컬을 보지 못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지. 아니나 다를까 레미제라블도 라이언킹도 전부 매진이었다. 솔직히 이 두 작품 외에는 보고 싶은 뮤지컬도 없었다. 하지만 기다린 시간이 아까웠다. 남은 스케줄상 오늘이 아니면 다음 여행 때나 런던에서 뮤지컬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내 눈에 ‘위키드’가 들어왔다. 이 작품에 대해 아는 거라곤 지하철역에서 봤던 초록색 배경의 검은색 마녀 그림의 포스터가 전부였다.
“위키드는 티켓 있어요?”
“아! 위키드는 있지!”
곤란한 얼굴이던 매표소 직원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 신나게 내게 끊어줄 좌석에 대해 설명했다.
“이 자리는 말이지 서클석이긴 하지만 무대가 전부 보이고, 사운드가 잘 들리는 좌석이야. 꽤 좋은 자리지.”
“그걸로 주세요!”
내 손에 위키드의 티켓이 쥐어졌다. 공연은 오늘 저녁.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가 완성된 기분이었다.
뮤지컬 티켓 사기 미션을 완수한 나는 코톨드 갤러리로 향했다. 유럽여행을 하며 느낀 점은 유럽 국가들은 청년과 학생들에게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원 없이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에 있는 미술관과 박물관들 중 99% 정도(내 체감상)가 학생과 청년에게 입장료를 할인해주거나, 아예 받지 않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돈이 있든, 없든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이들은 모두 동등한 문화적 체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코톨드 갤러리도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운 좋게 타이밍이 맞아 이런 좋은 미술관을 무료로 볼 수 있었다.
코톨드 갤러리는 건물이 가운데 공원을 네모나게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그 안에는 고흐, 드가, 마네, 모네, 쇠라 등… 오랫동안 책에서만 봐왔던 화가들의 작품이 가득했다. 미술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이 작가들이 이렇게나 많은 작품을 남기고 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기회의 평등에 대해 떠올렸다. 이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은 다른 국가에 태어난 아이들에 비해 얼마나 운이 좋은 걸까.
영국에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매운 음식이 당겼다. 제법 한식당이 있기는 했지만, 딱 봐도 내가 원하는 매운맛을 충족시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금액도 비쌌다. 나는 아직 김치찌개를 2만 원 주고 먹을 만큼 한식이 간절하진 않았다.
나보다 먼저 영국 여행을 갔던 친구에게 추천받은 햄버거 가게 ‘바이런 버거’로 향했다. 이미 여러 블로그에 ‘영국 수제버거 맛집’이라는 타이틀로 올라와 있는 가게였다.
나는 이곳의 대표 메뉴인 바이런 버거와 콜라를 시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까지 맛있지는 않았다. 수제버거 치고 패티의 감칠맛이 적고 한 입 먹었을 때 입 안에서 재료들이 어우러지는 느낌이 덜했다. 하지만 재료는 신선했고, 혼밥 하기에도 좋은 식당이었다.
햄버거가 먹고 싶다면 가보는 것도 좋지만, 맛집을 기대하기에는 모자란 가게였다는 게 내 총평이다.
이 글은 업체로부터 제품을 제공받고 솔직하게 쓴 리뷰 같은 게 아니니 믿어도 된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위키드를 보기 위해 공연장으로 향했다.
매표소 직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내 자리는 정말 한눈에 무대가 보이는 좌석이었다. 그도 그럴게 거의 하느님이랑 하이파이브 가능할 정도로 높은 꼭대기 자리에 앉았으니 한눈에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볼 때는 돈을 더 주고서라도 반드시 1층에 앉겠다고 다짐했다.
과거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교수님께서
"현지의 뮤지컬은 그 성량이 압도적이다.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교수님이 한국 배우들의 노력을 폄하한다고 생각했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애가 뭘 안다고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교수님의 말대로 나는 배우들의 가창력에 압도됐다. 뮤지컬 위키드는 스토리나 연출적으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취향을 넘어설 만큼 배우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위키드를 떠올리면 영국에서 들었던 디파잉 그래비티의 하이라이트가 자동으로 재생된다. 음악에 대한 충격은 한국에 내한 왔을 때 본 오페라의 유령보다 더 강했다. 그래도 작품 취향으로는 오페라의 유령을 더 좋아하지만.
인터미션 시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비로 나갔다. 나 또한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말 그대로의 문화 충격을 받았다.
로비에서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한 손에 맥주와 와인을 들고 자유롭게 대화 중이었다. 술은 로비 한 편의 바에서 판매 중이었다. 몇몇은 이미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뮤지컬 공연장에서 술을 먹는 행위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은 공연장 내에서 아무것도 못 먹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영국은 달랐다. 사람들은 영화관에 온 것처럼 스낵과 음료를 즐기며 공연을 관람했다. 영화관과 뮤지컬 공연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터미션 시간에 맥주와 스낵을 다 먹지 못 한 사람들은 그대로 자리에 들고 들어와 먹으며 공연을 관람했다. 그렇다고 공연 관람에 그들이 방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남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먹는 것에 그들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이 차이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지 고민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바로 티켓의 가격이었다. 이들에게 뮤지컬은 큰돈 모아 한 번 보러 오는 문화체험이 아니었다. 일상 속에서 문화를 즐기는 또 다른 선택지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뮤지컬이란 장르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상업성을 최우선으로 두고 제작됐다. 그렇기에 인간이 좋아하는 춤, 노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는 것이다. 상업성은 결국 대중성과 일맥상통한다. 많은 대중들이 즐긴다는 것만큼 상업성을 증명하기에 확실한 것이 없으니까.
과연 한국 뮤지컬은 뮤지컬의 본디 제작 목적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리고 이 차이가 대중의 문화 수준과 예술 함양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한국 뮤지컬 업계의 방향은 절대 최선이 아님은 분명하다고,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