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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Jul 12. 2022

무례와 인종차별은 무관심에서 온다


가끔 나의 명확한 취향이 어디서부터 발생된 것인지 모를 때가 있다.


나는 빅토리안 인테리어를 좋아한다. 그런 공간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주변에 사는 사람도 없었다. 어릴 때 본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라이온 킹뿐이라 공주님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 어쩌다 나는 생활의 흔적과 세월이 묻어 있는 나무 가구만 보면 심장이 뛰는 인간이 되어 버린 걸까.


아, 글을 쓰다가 깨달았다. 해리포터 때문이구나.

호그와트에 입학하여 마법사가 되고 싶었던 어린아이는 “내가 호구? 왓?”을 외치며 살아가는 말도 안 되는 어른이 됐다. 마법사를 꿈꾸던 시절의 기억은 진작에 발화됐다고 생각했는데 알게 모르게 이렇게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나 보다. 새삼 유년시절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나는 빈티지 디자인을 좋아하게 됐다. 나처럼 시간이 만들어낸 고즈넉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유럽만큼 좋은 여행지도 없다. 그저 길을 걷고, 지쳤을 때 카페에 들러 쉬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감을 느낄 테니까.


런던의 빈티지는 도회적이다. 웅장하고 화려하며, 뾰족한 고딕 건물들을 주로 볼 수 있다. 누가 봐도 돈 좀 있는 사람이 지었다는 느낌이다.

그 런던에서 대중교통으로 세 시간 정도 가면 ‘코츠월드’에 갈 수 있다. 코츠월드 지역에는 런던과는 사뭇 다른 시골의 소박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빈티지 마을이  있다. 런던이 해리포터라면 여기는 반지의 제왕이랄까.

좁은 3층 침대에 몸을 구기고 누워, 핸드폰으로 코츠월드의 사진을 발견하자마자 여기는 반드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코츠월드는 런던에서 왕복 6시간이나 걸리면서, 막차시간도 저녁 6시 20분이었다. 제대로 구경하려면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확실히 당일치기 여행코스로는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근처에서 1박을 하는 게 여행적으로 훨씬 편할 듯했다.

하지만 코츠월드의 숙소 가격은 1박에 10만 원 전후였다. 나는 가난한 배낭여행객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돈보다 시간이 더 많은 법이다. 몸을 갈아 넣어 하루를 고단하게 여행하는 것이 훨씬 저렴하다는 계산이 섰다.


3월 15일, 날씨 흐림. 오늘도 런던 날씨는 런던스러웠다. 입고 있던 점퍼를 추스르며 아침 7시 반 버스를 타고 사이렌체스트로 향했다.


사이렌체스트에는 오전 10시쯤 도착했다.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고 한 번 더 들어가야 코츠월드 마을 중 하나인 ‘비버리’로 갈 수 있었다. 오늘 내 목표는 ‘비버리’와 '버튼 온 더 워터’ 두 마을 방문하기였다.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려도 시선에 사람이 걸려들던 런던과 달리 사이렌체스트는 소도시답게 한적했다. 버스 도착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조식도 못 먹고 움직인 탓에 근처 마트로 들어가 제일 저렴한 1파운드짜리 샌드위치를 집었다.


계산을 기다리는 동안 나의 영혼은 잠시 육체를 벗어나 있어야 했다. 주변에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실례다. 그것이 지역사회의 소수인종에게 이루어진다면 명확한 인종차별이다. 그들에게 관광객은 낯선 존재가 아님에도 여전히 나는 ‘쳐다볼 만한’ 이방인이었다.


환멸의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을 때, 앞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쳐 왔다.


'이젠 하다 하다 눈 마주치고 당당하게 인종차별이냐.'


경계심을 한껏 드러내어 전투력을 높이던 내게 여성은 살포시 눈을 접어 웃었다.

이방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무언의 배려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한국의 공교육은 타인의 친절에 정색하라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입 꼬리를 삐죽 올려 마주 웃었다.


‘왜 웃어준 거지? 나의 공허해지는 눈동자에서 연민을 느꼈나? 내가 좀 안쓰러워 보였나?’


의문의 답은 여성이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냄과 동시에 밝혀졌다.


‘.. 신윤복? 저거 신윤복 그림 맞지?’


그녀의 지갑에는 신윤복의 단오풍정이 그려져 있었다. 단오풍정 굿즈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 한국에서도 본 적 없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신윤복의 그림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확신하건대 다른 작품까지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친절은 그녀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관심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녀에게 나는 '좋아하는 화가의 국가'에서 온 것일 수도 있는 ‘사람’으로서 인식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트에서 나를 쳐다본 사람들의 시선도 이해가 됐다. 그들은 평소에 타국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관심이 없으니 생각도 안 하게 되고, 생각을 안 하니 예의와 배려도 사라졌다.

무례함은 상대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발생한다.


나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성향이었다. 주변 사람들도 그걸 알았다. 그동안 냉소적이라 표현됐던 성격은 무관심에서 온 무배려였을 뿐일지도 몰랐다.


마을 버스정류장에 앉아 샌드위치를 뜯었다. 차갑고 푸석푸석했다. 샌드위치가 아니라 샌드위치 모형을 먹는 거 같았다. 얼마나 맛이 없었으면 지금도 그 샌드위치 맛을 떠올릴 수 있다. 맛없음이 뇌리에 박히기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어려운 걸 이 샌드위치는 해냈다. 한 달 판매량이 10개쯤 되는 제품인데 그중 하나를 내가 샀던 걸지도 모른다.


예상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마을버스를 타고 비버리로 향했다. 인종차별에 긴장하고 있던 내게 버스 기사님은 활기찬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가 좋아서 기사님과 가까운 맨 앞 좌석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마법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눈앞에서 정갈한 돌담길이 펼쳐지기 시작하고, 하늘은 어서 오라는 듯이 회색빛에서 푸른색으로 맑게 개기 시작했다.


그리고 버스가 멈추어 섰을 때, 나는 샤이어에 놀러 온 머글이 된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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