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마음에 드는 것에게는 쉽게 마음을 내주는 법이다. 이제 겨우 세 번째 방문했을 뿐인데 웨스트민스터를 ‘내 동네’ 같다라고 생각하는 나의 건방진 마음가짐처럼 말이다.
지금까지는 웨스트민스터 근처를 구경하거나 문 앞을 서성이기만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드디어 바라만 보던 웨스트민스터를 구경하는 날이었으니까.
런던 물가가 오른 건지, 아니면 관광객들의 주머니 사정이 의외로 넉넉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지 웨스트민스터의 티켓값은 인터넷으로 찾아봤던 가격보다 2유로나 더 비싸 있었다.
한 푼이 아까운 상태였지만 런던에서 KT 통신사 할인이 될 리도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20유로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입구 근처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무료로 빌릴 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한국어로 된 가이드가 제공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그동안 다녀갔으면 동북아시아 중 제일 작은 나라의 언어가 이곳 런던에서까지 제공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지나간 한국인들에게 속으로 감사 인사를 보내며 오디오를 받아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이놈의 고장 손이 또 말썽이었다. 분명히 직원이 잘 되는 걸 확인하고 넘겨주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건만, 이놈의 오디오 가이드는 내 손안에 들어와 정확히 버튼 한 번 눌리고는 먹통이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내 손에는 이상한 전파가 흐르는 게 분명하다. 희한하게 내 손에 닿은 물건들은 제 수명을 다 하지 못 하고 유명을 달리하는 것들이 많았다. 엄마는 내가 물건을 험하게 쓴다며 화를 내셨지만, 나는 매번 억울할 따름이었다.
사실 영국으로 넘어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단지 영화를 보기 위해 눈앞의 스크린을 몇 번 눌렀을 뿐인데 갑자기 화면이 꺼지면서 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직원도 몇 번이나 재부팅을 시도했으나 결국 까매진 스크린은 런던에 도착할 때까지 켜지지 않았다.
그 물건들은 내 손 안에서 눈을 감는 것이 운명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억울하잖아.
다행히 웨스트민스터의 직원은 망가진 오디오 가이드에 대해 별 의문점을 가지지 않고 곧바로 다른 기기로 교체해 주었다. 직원 입장에서는 막 받아간 물건이 망가졌다고 하니 원래 물건 자체에 이상이 있었겠구나, 싶었던 거겠지만 나만은 내 고장 손의 이력을 알기에 미안한 감정이 마음 한켠에서 살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렇다고 거기서 갑자기 고장 낸 물건들의 약력을 읊으며 기계값을 일부 물어주기에는 내 지갑은 2유로에도 휘청일 정도로 종잇장 같았다.
웨스트민스터는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마 그곳에 잠들어 있는 위대한 인물들의 무덤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인 듯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무조건 방문해야만 볼 수 있는 희소성을 가짐으로써 관광객을 꾸준히 유지하기 위한 마케팅 방법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였다.
동산 같은 무덤에 익숙해 있던 내게 예술 작품처럼 조각되어 있고 꾸며져 있는 형태의 무덤은 생소하고 낯설었으나 그만큼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왔다. 동양권에서 무덤의 이미지는 귀신, 공포, 으스스함인데 이곳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무덤이 살아있는 자들의 생활권 중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를 통해 죽은 사람을 대하는 각 나라 문화권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무덤은 산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여기는 삶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잊으며 살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을 듯했다.
서양의 공포 영화에서 귀신과 괴담을 찾기 힘들었던 이유도 이런 문화 때문인 듯했다. 그들에게 죽은 사람은 무서워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에는 뉴턴과 다윈, 스티븐 호킹이 잠들어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묘비명에 적힌 이름이 단지 기념하기 위해 써놓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들의 육신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뜻이기에. 묘하게 시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정말로 존재했던 사람들이구나. 위인전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 아니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와 똑같은 인간 한 명이 떨칠 수 있는 영향력의 넓이가 감탄스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의 끝은 죽음이라는 게 개탄스러웠다.
그러나 죽은 후에도 웨스트민스터에 방문한 많은 이들에게 또 다른 영감을 주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경이로웠다.
왜 나는 어린 시절 수학여행으로 경주에 갔을 때 이 정도 감상을 가지지 못했을까. 너무 끌려가 듯이 간 거라 그랬나.
웨스트민스터는 여전히 대관식과 왕족의 결혼식, 그리고 미사가 행해지는 영국의 중요한 장소였다. 역사 속 건물을 현재까지 계속 이용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다양한 의미를 갖게 만들었다. 영국이 이곳에 묻어 있는 역사와 시간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런 자부심이 부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영국과 반대로 한국은 무조건 새것이 좋다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재건축이 당연하고, 좋은 곳은 곧 새로 지은 곳이었다. 우리나라도 역사가 깊은 나라인데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이가 이렇게까지 근본적인 다름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자정 없이 계속해서 이어져간다는 게 안타까웠다.
웨스트민스터에서 나와 다시 런던아이 방향으로 향했다. 런던아이 타기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줄이 제법 길었으나 관람차 하나에 들어가는 인원수가 꽤 많았다. 금방금방 줄어드는 줄을 따라 걸으며 몸을 기울여 앞줄의 시끄러운 방향 쪽을 쳐다보았다.
ENFP가 분명해 보이는 런던아이 직원들이 계단 중간쯤에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나는 일행이 없었기 때문에 멀뚱히 혼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놀이공원 후룸라이드 기념사진처럼 관람차 출구 쪽에서 돈을 내고 인화하여 받을 수 있었다.
이럴 때면 내가 사진을 잘 못 찍는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졌다. 미련 없이 인화의 욕망을 버리고 떠날 수 있으니까.
관람차 하나당 10명 정도가 탑승했다. 그 순간만큼은 10명 모두가 일행이 됐다. 우리는 공중에서 다시 발이 땅에 닿기까지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일부러 매직 아워 시간을 노려서 해 질 녘 시간에 관람차에 올라탄 보람이 있게 런던 전경이 보기 좋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복잡하고, 크고, 옛것의 정취와 현대의 모던함이 섞여있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때까지는 그렇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