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런던아이 주변 펍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요일에 개의치 않고 사람이 꽉꽉 들어찬 술집이란 건 한국이나 영국이나 마찬가지인가 봐요.. 그래요, 사는 게 다 그렇죠. 맨 정신으로 살아가기에는 문명사회가 제법 각박해요.
아무래도 내일은 나도 쉬어줘야 할 거 같았다. 절대로 술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시차 적응도 안 된 상태로 숙소를 옮겨 다니느라 제대로 쉬지를 못 했더니 슬슬 몸에 무리가 오는 게 느껴졌다.
한 번 와 봤다고 마치 20년 차 런던 시민처럼 허세를 부리며 지하철을 탔다. 중 1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첫 만남에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는 어린 게 왜 이렇게 겉멋이 들었냐?"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통찰력 있는 친구다.
그 친구와는 20살 때까지 친하게 지냈다. 녀석이 재수학원에 들어가며 속세와 연락을 끊는 바람에 자연스레 나와의 연락도 두절됐다. 친구야,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여전히 간죽간살의 인생을 살고 있단다.
편의점에 들어가 냉장고 안에 늘어져 있는 병맥주들을 눈으로 훑었다. 런던에 왔으니 ‘런던’이란 이름이 들어간 맥주를 먹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나는 지갑과 함께 여권을 꺼냈다. 예상대로 점원은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나는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꾹 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내가 성인임을 증명했다.
하, 이런 거 좋아하면 나이 먹은 거라던데… 나이 먹은 거 인정할 테니 평생 술 마실 때마다 신분증 검사받으며 살게 해 주세요, 아멘.
새로 옮긴 숙소는 지하 한 층 전체를 휴게공간 겸 식당으로 운영했다. 이미 몇 명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뭔가를 먹거나 컴퓨터를 하며 개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부엌에서 그릇을 꺼내와 맥주와 함께 사 온 햄과 치즈를 옮겨 담았다. 무사히 영국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조촐한 나 홀로 파티였다.
런던 라거는 나름대로 닉값하는 맥주였다. 누가 영국 맥주 아니랄까 봐 맛이… … 여기까지 하겠다. 누군가는 런던 라거를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조촐한 파티를 끝내고 생활관 같은 도미토리룸으로 올라갔다. 16인실에 단 하나뿐인 화장실이 붐비기 전에 여권, 핸드폰, 지갑, 카메라를 캐비닛에 넣고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 캐비닛에 넣은 전재산을 다시 꺼내 침대 위로 가지고 올라와 머리맡에 놓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 펍에서 한 외국인과 대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마침 한 달 전 유럽여행을 막 끝마치고 온 참이었다. 그는 내게 유럽여행 내내 절대 방심하지 말라 충고했다. 심지어 열쇠가 있는 캐비닛조차 믿으면 안 된다고 했다. 잘 때 캐비닛에 넣어놨던 자신의 300만 원짜리 카메라를 누가 자물쇠를 뜯어가 훔쳐갔다면서.
그 말은 도미토리룸을 이용하는 한 내 밤은 절대로 편안해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마치 토끼처럼 자면서도 주변의 소음에 계속 귀를 열어두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머리 위 테라리움처럼 뻥 뚫린 천장으로 달빛이 드리웠다. 런던도 수도라서 그런지, 아니면 날씨가 흐렸기 때문인지 까만 밤하늘 위로 반짝이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허세를 부렸지만 여전히 모든 게 낯설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익숙해질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뭐든지 길어지면 일상이 되어버리는 법이다.
'뭣하면 지금 당장 한국행 비행기 티켓 끊고 돌아갈 수도 있는 걸.'
내가 원하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눈을 감았다. 타인에게나 하는 선의의 거짓말을 나는 나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하루 푹 쉬어주고 무료로 제공되는 조식을 챙겨 먹은 뒤 애비로드로 향했다.
밴드의 나라답게 런던 길거리 곳곳에서는 유명한 밴드들의 포스터나 굿즈, 상징물들을 볼 수 있었다. 비틀즈, 롤링스톤즈,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이 도시가 더 경이롭게 느껴질 듯했다.
아무래도 이미 서태지가 활동 중이던 대한민국에 태어난 나로서는 비틀즈의 음악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틀즈의 이미지들은 좋아했다. 역시 굿즈는 클래식한 게 예쁘니까. 마침 또 쓰고 있는 다이어리도 비틀즈의 굿즈였다.
애비로드에 도착하자마자 다이어리를 쫙 펼쳐 비틀즈의 사진과 현재의 거리를 비교했다.
안타깝게도 사진 속 모습과 분위기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참고로 이 도로는 실제로 이용되고 있는 도로기 때문에 사진을 찍으려면 차가 오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만약 자신이 포토샵 능력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 도로 옆으로 쫙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포토샵으로 지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나와 같은 이유로 방문한 관광객들은 이곳이 비틀즈가 실제로 걸었던 도로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였다. 다들 비틀즈처럼 일렬로 멈춰 서서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비틀즈가 걸었던 도로보다 주변의 집이나 카페가 더 예뻤다. 런던에서 이런 주택에 거주하는 삶이라면 누구보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런던 집값도 미쳐 날뛰는 통에 웬만한 사람들은 이곳에서 살기 힘들다고 들었다. 역시, 한국이나 영국이나. 수도권 생활은 어딜 가나 팍팍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