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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Oct 27. 2022

반지의 제왕 덕후를 설레게 만드는 도시 에든버러


에든버러의 날씨는 영국보다 변덕스러웠다. 햇빛이 쨍하니 내리쬐다가도 금세 흐려지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나 싶더니 다시 햇살이 비추기를 반복했다. 


비올 때 우산을 쓰지 않는 영국의 ‘멋’은 사실 ‘귀차니즘’으로부터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보편적인 귀차니즘과 우산을 쓰지 않는 멋쟁이들의 사진 몇 장이 운 좋게 합쳐지며 ‘영국 감성’이 된 거지. 

제법 합리적인 추론이라 생각한다. 솔직히 산업화 시대 이후로 우산 안 쓰고 살기 쉽지 않잖아.


비가 내리고 나면 에든버러의 공기는 더 차가워져 사람들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이런 날씨에 길가에 서서 스코틀랜드 전통 의상인 킬트를 입고 백파이프를 부는 사람은 어떤 장인의 경지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닐까?



블랙핑크만큼 체크 치마가 잘 어울리는 남자를 보니 나도 한 벌 장만하고 싶어졌다. 마침 에든버러 캐슬로 올라가는 길에 다양한 킬트를 파는 옷 가게가 있어 들어갔다. 


그거 아는가? 다들 어떤 작품의 영향을 받은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오타쿠는 체크를 좋아한다.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색색의 체크들이 내 눈을 휘어잡았다. 치마, 재킷, 양말, 머플러 등등… 세상의 모든 체크들이 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체크 제품들이 걸려 있었다.


혹시 그것도 아는가? 애매한 오타쿠는 오타쿠처럼 보이는 아이템을 안 산다. 진짜 오타쿠처럼 보이니까. 그 뜻은 내가 이곳에서 아무것도 사지 못 하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래서 애매한 건 힘들다. 차라리 진짜 오타쿠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머글이었으면 예쁘다고 머플러라도 한 장 사고 나왔을 것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나 때마침 눈앞에 에든버러 성이 나타났다. 나는 충동적으로 길게 늘어선 줄 뒤로 자리를 잡았다. 자고로 기분이 안 좋을수록 새로운 경험을 해줘야 한다. 그래야 과거의 감정에 갇히지 않고 현재의 자극에 시선을 돌릴 수 있다.


성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표를 끊고 성 안으로 들어섰다. 돌계단을 오르며 점차 좁아지는 성안의 길에 설레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게 인생 영화가 뭐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반지의 제왕’을 외쳤다. 그렇다. 에든버러 성은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투박하지만 견고하고, 전투를 위해 만들어졌음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생활을 흔적이 느껴진다는 면이 상당히 감동적인 성이었다. 반지의 제왕 두 번째 시리즈인 ‘두 개의 탑’에서 곤도르의 옛 수도 ‘오스길리아스’가 풍기는 분위기와 유사했다.  


도대체 언제 인종차별을 당했냐는 듯이 벅차오르는 감정이 내 눈가를 뜨겁게 달구었다. 역시 사랑하는 것이 많을수록 인생은 풍요로워진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곳이 에든버러 성이었던 것에 대해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렇죠. 당신께서 보시기에도 조국을 떠난 이 어린양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것 같죠. 당신께서 보내신 사과의 뜻,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땡큐.



그림과 갑옷이 전시되어 있는 그레이트 홀과 세인트 마거릿 예배당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한산한 덕에 가까이서 여유롭게 볼 수 있었다. 


에든버러 성은 하나의 작은 마을처럼 느껴졌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상상을 하며 성벽 위로 올라갔다. 눈앞에 에든버러의 전경이 펼쳐졌다. 높은 빌딩 하나 보이지 않는 조용하고 예스러운 도시.



인정해야 했다. 나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영 아니었지만, 에든버러의 풍경은 나에게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성의 막힌 길 하나하나까지 잔뜩 만끽하고 내려가려는데, 일렬로 쭉 늘어선 관광객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벽 쪽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대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의 리빙포인트! 잘 모르는 관광지에 갔을 때, 관광객들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몰라도 일단 같이 기다려 보는 것이 좋다!


나도 꾸역꾸역 사람들 틈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 대포를 바라봤다. 이들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이 이만큼 쌓인 걸 보면 조만간 무언가 벌어질 게 분명해 보였다. 


잠시 뒤, 군복을 입은 남자가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대포의 포구를 위로 향하게 조절하더니 이내 빵!!! 하고 포탄을 쏘아 올렸다. 


생각보다 큰 소리에 곳곳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렸다. 나도 흥미진진한 눈으로 다음 발사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자는 다시 절도 있는 발걸음으로 되돌아 들어갔다. 바글바글 몰려있던 사람들도 이내 뿔뿔이 흩어졌다.


혹시 하는 아쉬움에 잠시 자리를 지키던 나는 눈치껏 더 이상 포탄 발사가 없다는 걸 알아채고 다시 가던 발걸음을 옮겨 내려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에든버러 성의 포탄 발포 행사는 하루 중 단 한 번, 오후 1시에만 열리는 것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온 거 치고 운이 좋았던 관광이었다.



내려오는 길에 발견한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컵을 건네받자마자 코로 스며드는 커피 향이 행복감을 고취시켰다. 2층으로 올라가 창가 자리에 앉아 바로 커피를 한 모금 물었다.


지금껏 마신 카푸치노 중 제일 맛있는 카푸치노였다고 자신할 수 있다. 거품의 부드러움과 에스프레소와 우유가 섞이며 나는 쌉쌀하고 고소한 맛의 균형이 정말 완벽했다. 완벽한 커피 한 잔은 사람을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창밖에는 빗방울이 다시 약하게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이 변덕스러운 에든버러의 날씨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카푸치노였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발생한 개똥 같은 기분은, 새로운 자극과 좋아하는 것들로 밀어내 줘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맡겨 놨던 짐을 찾고 체크인을 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있던 두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두 남자도 나를 보고는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내 직감은 틀림없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냅다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시죠?”


브라보! 얼마 만에 내뱉는 한국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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