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에서 간만에 만난 한국인들은 입대 전 축구 여행을 온 친구들이었다.
“축구 여행이요?”
그렇다. 생각해보니 유럽은 축구로 유명했다. 축구에 문외한인 나는 전혀 생각지 못 한 여행이었다. 유럽은 뭐 이리 갖고 있는 문화가 다양하냐.
“입대하기 전에 꼭 한 번 직접 보고 싶어서 왔어요.”
“지금 시즌이에요?”
“네. 그래서 보고 왔어요. 유니폼도 사고.”
“와. 나도 보고 싶다. 지금 티켓 구할 수 있나?”
“구할 수는 있는데 암표로 사야 할 걸요. 저희도 웃돈 주고 샀거든요.”
“헉. 진짜요? 얼마요?”
“한국돈으로 한… 60~70만 원 준 거 같은데.”
“티켓 가격이??”
“좋은 자리는 150만 원도 넘어가요.”
“와… 미쳤다.”
“왔다 갔다 하는 비용도 비슷하게 들어요. 경기날은 비싸져서.”
다양한 경험을 체험해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축구 경기 보러 가기는 차마 시도해볼 엄두도 안 났다. 사실 축구 룰도 잘 모른다. 그냥 골 들어가면 1점이라는 개념뿐인 사람에게 유럽 프리미어 리그는 너무 사치스러운 경험이다.
같은 나라에 여행 와도 관심사에 따라 이렇게 여행 스타일이 달라진다는 점이 또 한 번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내가 한 여행이 전부가 아니다. 세상에는 살면서 반드시 가봐야 할 곳도, 반드시 먹어봐야 할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SNS와 미디어에서 이용되는 문구가 시장 겨냥을 위한 마케팅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동안 내가 느끼고 있었던 상대적 박탈감이 얼마나 얕고 무의미한 것이었는지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에든버러는 보물 찾기처럼 구석구석 숨어 있는 명소가 많은 도시였다. 조앤 k. 롤링이 해리포터를 집필했다고 알려진 ‘카페 엘리펀트’부터 다이애건 앨리 디자인에 영감을 준 빅토리아 스트리트, 그림 같은 올드타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에든버러스러움’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이 도시를 떠날 날이 다가왔다.
이곳에서 한 일이라곤 밥을 먹으러 식당을 가고, 거리를 걷고,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며 일기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나의 여행이었으니까.
다음 목적지는 인버네스였다. 캐리어를 끌고 에든버러에 도착했던 첫날 각오했던 45도 경사의 오르막길을 올랐다. 캐리어 바퀴가 돌로 만들어진 길 위에서 텅텅 거칠게 긁힐 때마다, 조만간 새로운 캐리어를 구매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안 좋은 예감이 몰려왔다. 왜 항상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지.
인버네스는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에든버러도 소도시지만 인버네스는 이곳보다 더 한적한 도시였다.
내가 이 낯선 도시로 향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곳은 네스호의 괴물, 네시가 발견된 마을이었다.
네시. 사진의 색깔이라고는 흰색과 검은색뿐인 시절에 찍힌 정체불명의 괴생물체. 불쑥 튀어나온 긴 목은 정석적인 바다 공룡의 생김새라, 한창 공룡 좋아하는 나이대인 미취학 아동 시절의 나를 홀리기 충분했다.
아, 그래서 어린 시절의 동심을 떠올리기 위해 인버네스에 가는 거냐고? 아니다. 네시는 단 한 번도 동심이 된 적이 없었다. 네시는 그 자체로 내게 ‘낭만’이 되었다. 밝혀낼 수 없는 비밀이 주는 무력감과 짜릿함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되지 않는다.
세상에 불가사의, 외계인, 공룡 싫어하는 어른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앗, 잠시만요. 다들 왜 자리에서 일어나시는 거예요. 제 글은 앉아서 읽어야 더 재밌답니다. 모두 착석해 주세요.
기차의 차창 밖으로 스코틀랜드의 자연이 펼쳐졌다. 본가가 강원도라 웬만한 산과 시골 풍경에는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곳의 풍경은 한국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평화롭고 광활하고 자연이 만들어낸 색깔들이 완벽할 만큼 조화로웠다. 사람들이 스위스를 찾는 이유가 이런 걸까, 어렴풋이 공감하게 되었다.
인버네스는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도 별로 없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그만큼 적다는 뜻이다.
예약한 숙소는 체크인 시간이 아님에도 방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침대를 비울 필요가 없으니 굳이 손님을 기다리게 하지 않는 듯했다.
짐가방을 풀고 인버네스의 거리를 천천히 구경했다. 커다란 대로변에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산한 곳이었다. 조용한 거리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때마침 눈앞에 커다란 공동묘지가 나타났다. 길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동묘지를 본 적은 몇 번 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왠지 타인이 들어가서 죽은 이의 무덤을 본다는 것이 큰 실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는 묘지 안으로 발을 디뎠다.
서양 미디어에서 공동묘지를 활용하는 방법은 동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죽은 사람을 보내주며 슬퍼하는 장소, 죽은 자가 깨어나는 공포의 장소, 등장인물의 기이한 성격을 강화시키기 위해 데려가는 장소.
만약 직접 들어가 보지 않았다면 공동묘지는 영원히 내게 ‘무서운 곳’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공동묘지에서 느낀 감정은 편안함이었다. 평화로웠고 마음이 안정이 찾아왔다. 묘지 가운데에 심어진 커다란 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 몇 년 만의 말 그대로의 ‘멍’을 때렸다.
이곳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나뿐이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불친절한 여성 호르몬처럼, 나에게는 자기혐오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반복적으로 찾아왔다.
초반에는 뜬금없이 올라오는 수치심과 자괴감이 당황스럽고 괴로웠다.
이 불청객은 밥을 먹다가,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공부를 하다가, 예상치도 못 한 때에 방문하여 사람의 기분을 순식간에 바닥까지 추락시켰다. 파도처럼 밀려와서 저수지처럼 고여버리는 이 감정은 너무도 부끄러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간 뭉크의 전시회에서 내 마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 절망이 나를 관통하는 순간 」
‘절규’ 작품 옆에 붙어 있던 뭉크의 글이었다. 그 문장을 보자마자 뭉크가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며 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자기혐오의 감정을 나만 느끼며 살아가는 게 아니란 것도. 그건 곧 나 혼자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 뜻이었다.
멍하니 묘비를 보고 있자니, 정신없는 여행 속에서 나올 기미만 찾고 있던 자기혐오가 고개를 들이밀고 인사를 건네 왔다. 나는 가만히 이 원인 모를 수치심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나왔다. 주변에 나를 보는 이도 없고, 당장에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생각되니 내가 해야 할 건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처음으로 자기혐오를 눈물로 흘려보냈다.
내게 필요했던 것 중 하나는 스스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