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침대에서 들리는 부스럭 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룸메이트는 여행객이 아니라 인버네스에서 일하는 사람인 듯했다. 그는 출근 준비를 마치자마자 초록색 작업복을 챙겨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제일 먼저 카카오톡을 열었다. 지난밤 동안 읽히길 기다리는 메시지 수십 개가 빨갛게 쌓여 있었다.
단톡의 시답잖은 수다라고 생각했던 나는 발신자 목록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곧바로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 걸려 있던 커다란 TV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식탁에는 몇 없는 투숙객들을 위한 조식이 간단하게 차려져 있었다. 나는 접시에 빵과 햄, 치즈를 올리고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챙겨 TV 정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바로 아침 뉴스를 틀었다.
런던에서 테러가 있었다. 며칠 전까지 내가 지겹도록 걸어 다녔던 다리 위로 경찰과 구급차들이 즐비했다. 웨스트 민스터를 배경으로 아나운서가 발생한 테러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IS가 벌인 일로 추정된다는 멘트와 동시에 지난 여행 내내 모든 관광지마다 받아야 했던 가방 검사가 떠올랐다.
사람이 몰리는 곳은 그들의 타깃이 되기 쉬웠다.
상황을 확인한 후에야 밀린 카톡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다들 나를 걱정해주는 메시지였다. 나는 여행 근황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간간히 전하고 있었다.
바로바로 사진을 업로드하지 않은 탓에 인스타만 보면, 여전히 나는 런던의 복잡한 거리를 헤매고 있는 여행객이었던 것이다.
나는 메시지를 보내준 사람들에게 하나씩 답장을 보냈다. 걱정해줘서 고맙고, 나는 며칠 전 스코틀랜드로 넘어와서 무사하다는 내용이었다.
작년 라오스에 갔을 때도 버스 전복 사고가 났었는데, 그게 마침내 여행 시기와 경로에 딱 맞아떨어져서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켰었다. 그 당시도 충동적으로 여행을 하던 스타일이라 원래 계획과 다른 곳에 들려,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라오스에 도착했었다.
그 당시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호스텔에 무겁게 깔려 있던 두려운 분위기. 침대 밖에서 나오지 못하던 사람들. 한국인처럼 보여서 말을 걸어 괜찮냐고 묻자, 자신이 그 사고 차량의 뒷 차를 타고 왔다고 조심히 내뱉던 목소리. 지형 탓에 구급차량이 빨리 오지 못 하여 죽은 사람들을 일렬로 길에 널어놓고 있었다는 증언. 그리고 그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아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빨리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던 절박함.
여행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보편적으로 ‘좋은 것’이라 기억되는 이유는, 모두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다 허망하게 죽어서 되돌아간다. 어떤 여행객이 어디서 뭘 하다 어떻게 죽었으니 조심하라는 말이 관광지 설명의 클리셰일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지금은 테러 때문에 더 여행하다 죽기 좋은 시기였다.
당연히 당장 한국으로 되돌아와야 하는 거 아니냐는 답장이 몇 명으로부터 되돌아왔다.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지금 당장 런던에서 한국행 티켓을 끊고 돌아가 “아~ 런던 여행 재밌었다~”해도 “뭐야? 너 유럽여행 가는 거 아니었어? 다 구라였냐?”라고 물어볼 사람 하나 없었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답장했다. 유럽 전반에 퍼진 테러에 대한 긴장감이 두려운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지 못 한 채로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살게 될 삶이 더 무서웠다.
답장을 받은 친구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지금 내 상황에 대해 아주 정확한 정의를 내려줬다.
“너 여행이 아니라 가출을 한 거구나?”
카메라와 가방을 챙겨 네스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노선을 물어보기 위해 안내소에 입장했을 때, 이 동네에서 보기 힘든 낯선 동양인 여자를 향한 의문의 눈빛이 느껴졌다. 며칠 내내 나를 따라붙었던 인종차별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내 다리 위로 기어오르는 듯했다.
그러나 이들은 내가 ‘네스호’로 가는 방법에 대해 묻자마자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심지어 내가 내릴 곳을 헷갈려하며 버스에 앉아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더니, 친절하게 벨을 눌러주며 이곳에서 내리면 된다고 알려주기까지 했다.
인버네스 사람들에게 네스호는 지나간 전설이 아니라 지금의 자랑일지도 모른다.
인버네스는 에든버러보다 날씨가 좋았다. 아니, 지금껏 들린 영국 모든 도시 중에 제일 날씨가 좋았다. 햇빛을 받아 시리게 반짝이는 강은 미술관에 걸려 있는 풍경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네스호를 보기 위해서는 어거트 캐슬이라는 유적지에서 내려야 했다. 다 부서져 형체도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이 요새의 옆으로 네스호가 미스터리 한 분위기를 풍기며 흐르고 있었다.
네스호는 생각보다 크고, 예뻤고, 평안했다. 무너진 요새와 어우러진 그림이 완벽한 호수였다. 얼핏 봐서는 괴물이 나올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처럼 버스를 타고 이곳에 온 사람은 드문 듯했다. 사실 여기는 이 요새를 보고 나면 더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관광지였다. 요새의 크기도 작아 성질 급한 사람은 5분 만에 볼 거 다 봤다고 선언할 수 있을 정도인 곳이었다.
당연히 나의 관광도 금방 끝이 났다. 하지만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아 있었다.
나는 길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네스호를 쳐다봤다. 어차피 이러려고 온 거라 시간낭비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울렁이는 호수의 표면을 계속 바라보니 꼭 최면에 걸릴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면으로 본 헛것일지라도 네스호에서 네시 주둥이 끄트머리라도 보고 가고 싶었다.
맞다. 나는 네스호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엉덩이 뼈가 어떻게 생겼는지 느껴질 정도로 오래 앉아 있었지만 이곳은 괴물이 나타나기엔 너무 개방적이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혹시라는 기대를 한 건 사실이지만, 당연히 보지 못 할 것이란 예상도 하고 있었다.
괴생물체를 우연히 만나기에 나는 그렇게 운이 좋은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미지와의 조우가 잦은 인간이었으면 지금 내가 여행 에세이가 아니라 ‘눈 크기가 얼굴의 반 만했던 그 녀석, 알고 보니 외계인?’이런 글을 연재하고 있었겠지. 한 번씩 ‘소설이 꼭 경험담 같네 ‘라는 댓글에 ‘레알 실화입니다’라는 대댓도 남겨 주면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거대한 네시가 간판에 매달려 있는 기념품샵을 보았다.
네스호의 괴물이 인버네스 주민들이 만들어낸 마케팅 중 하나라는 가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네시를 찾아 네스호에 오지 않을 이유가 수는 없었다. 네시는 이미 내 안에 ‘로망’으로 오랜 시간 자리 잡고 있었다.
평면 지구를 믿는 사람의 마음도 이런 걸까?
하지만 그들과 나는 큰 차이점이 있다. 평면 지구를 믿는 사람들은 과학적 근거를 봐도 믿지 않지만, 아직 네스호의 네시는 과학적으로 무언가가 밝혀진 게 없으니까! 여전히 가능성 면에서 네시의 압도적인 승이다!
…라고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몇 년 뒤 네스호에 대한 새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네스호에 함유되어 있는 DNA를 채취하여 분석한 결과 그곳에는 사람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DNA가 발견되었으나, '파충류’의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네스호의 생태계를 생각해봤을 때, 사진에 찍힌 것은 공룡이 아니라 ‘거대 뱀장어’ 일 가능성이 높다는 첨언까지.
…
과학은 사실적이고 이성적인 대신, 낭만을 가차 없이 부숴버린다. 이래서 이과 놈들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