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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에서 극락을

휴직하고 세계여행 11

by 하라

세계여행을 마음먹고는 세계지도를 자주 봤다. 구글 지도에서 아무 곳이나 확대하고 그곳에 뭐가 있나 찾아보면 어김없이 한국인들의 리뷰가 있었다. ‘가볼만한 곳’과 ‘맛집’ 추천은 덤이다. 지구 구석구석 퍼져있는 대단한 한국인의 후기를 벗 삼아 ‘이포’라는 도시를 가고 싶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도시인데 다음 목적지인 페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며칠 쉬며 맛집을 찾아디니면 좋겠다 싶었다. 이포는 미식 도시로 알려져 있다. 페낭과 비슷하게 화교가 많아 다채로운 먹거리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예매 어플에서 열차를 예매해 쿠알라룸푸르에서 3시간 정도 걸려 이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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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의 건물들은 낮았고, 잿빛이었다. 페인트가 다 벗겨져 한층 쇠락한 느낌을 주었다. 하수구가 덮여있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 있어 악취도 나고 쥐도 많이 보였다. 날씨도 흐린 데다가 찾아간 맛집은 휴무일이라 뭔가 제대로 되는 게 없는 일정이었다. 벽화 거리가 유명하다는데 우리나라 논골담길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숙소는 최악이었다. 깔끔한 목재 건물로 첫인상은 좋았으나 방음이 문제였다. 밤새도록 울려대는 거리의 음악이 고스란히 들어왔고, 비트에 맞춰 방은 둥둥 울렸다. 같은 여행지도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영 다르게 인식된다. 누구에게는 환상적인 여행지가 또 다른 이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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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포에서 좋은 기억은 하나 건져야겠다 싶었다. 그랩을 불러 타고 ‘극락동’에 갔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본 바투 동굴과 비슷한 석회동굴이다. 1920년대에 처음 발견된 이 동굴은 60년대에 불교사원으로 개발되었다고 한다. 바투 동굴은 원숭이 떼와 쓰레기로 꽤나 지저분했는데 극락동은 매우 깨끗하다. 원숭이에게 음식을 주지 말라는 경고문도 여기저기 붙어 있다. 동굴의 기암괴석은 신기했다. 사람들은 여기를 발견하고 극락의 모습을 상상했나보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 세계에서 가장 신성한 성상을 모시고 파라다이스라 명명했겠지. 바투 동굴이 힌두 사원으로 꾸며진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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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동굴 끝까지 걸어가면 갑자기 환한 세상이 나온다. 극락동의 보물 같은 정원에 가려면 동굴을 통과해야 한다. 정원에는 작은 호수가 있는데 오리배를 탈 수 있다. 호수는 깎아지른 절벽을 끼고 길게 이어져 있다. 오리배 페달을 밟으며 망중한을 즐긴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이포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극락에 들어와 있다.

짧은 이포 여행을 마치고 기차역에서 페낭 가는 열차를 기다린다. 작은 소녀가 귀여워 손을 흔드니 화답해 준다. 소녀가 엄마 품에 안겨 할머니와 작별하는 걸 지켜본다. 한참 손을 잡고 있던 할머니가 플랫폼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는 엉엉 운다. 그 모습조차 귀엽다. 역사를 나서는 아이에게 손을 흔드니 울면서도 우리에게 손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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