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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없이 혼자 쿠알라룸푸르

휴직하고 세계여행 10

by 하라

여행 전부터 걱정하던 아내의 허리가 심상찮다. 언덕에 위치한 호텔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간 탓인지 허리통증이 심해졌다. 아직 여행 초반인데 무리하지 말자 싶었다. 결국 우선 나 혼자 쿠알라룸푸르 여행을 한다.

지하철을 타고 ‘술탄 압둘 사마드’에 쉽게 도착했다. 영국이 말레이시아를 식민 통치할 때 정부 부처가 모여있던 건물이다. 당시 술탄이었던 압둘 사마드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는데 아름다운 아치형 창문과 돔이 특징이다. 건물 벽과 바닥은 정교한 타일 장식으로 꾸며져 있고, 기하학적 패턴과 아라베스크 문양이 보인다는데 내부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무어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베리아반도와 북아프리카에서 발전한 이슬람 건축 스타일이다. 대륙 저편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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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압둘 사마드’ 앞으로는 광활한 광장이 펼쳐진다. ‘므르데카 광장’이다. 1957년 8월 31일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역사적 광장이다. 우리로 말하자면 조선총독부 앞 광화문 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한 격일까. 광장 한켠에 국기 게양대가 우뚝 서있다. 독립이 선포된 날, 영국 국기를 내리고 말레이시아 국기를 올린 역사적 현장이다. 광장에 있는 도서관에 들어갔다. 밖은 불지옥인데 도서관은 천국이다. 여기에도 미래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가득이다. 미래 따위는 잠시 잊고 오늘에 충실한 여행자의 여유를 누린다. 여행은 온통 처음으로 가득 차 있다. 처음 걷는 길, 처음 가는 곳, 처음 겪는 경험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떤 감정을 느낄지 모른다. 모든 게 익숙한 일상과는 다르다. 긴장되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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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술탄 앞둘 사마드’를 지나 골목으로 꺾으면 이슬람사원인 ‘마시드 자멕’이 나온다. 역시 무어 양식으로 아치형 창문과 돔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모스크를 잘 보지 못하니 신기하다. 여자는 스카프를 빌려 머리를 가려야 하고 남자도 짧은 바지는 안 된다. 신발을 벗고 모스크에 들어서니 기도하는 사람들, 누워서 낮잠 자는 사람들, 꾸란을 읽는 사람들이 보인다. 예배당 안은 그림이나 글자도 없이 그저 흰색 벽이다. 겉모습과는 달리 소박한 모스크가 아직은 신기하다.

남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관우를 모신 중국식 사당이 나온다. 잠시 들러주고 다시 5분 정도 걸으면 ‘스리 마리아만 사원’이다. 힌두교 사원인데 우리나라에선 이슬람보다 접하기 힘든 종교 아닌가. 역시 신발을 벗고 입장한다. 규모가 작아 10분이면 다 볼 수 있는데 처음 보는 조각상과 탑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힌두교의 첫인상은 강렬한 화려함이었다. 총천연색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온갖 동물이 조각되어었다. 힌두교는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과 장식으로 가장 이상적인 인간과 동물을 신으로 모신 종교가 아닐까. 이슬람 사원이 막상 들어가면 회백색의 기도공간 밖에 없는 것과 정반대로 꾸밈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곳은 히잡을 쓴 무슬림, 중국인, 유럽인, 힌두계 인도인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그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는지 여행자인 나는 모르지만 '다양'이라는 단어를 도시화하면 쿠알라룸푸르가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는 페탈링 거리가 있다. 차이나타운 야시장이라고는 하나 음식점보다는 기념품 상점이 많다. 죄다 가품이고 살 만한 것은 없었다.


다음날, 아내의 허리는 여전히 안 좋다. 자신은 글렀다며 오늘도 혼자 다녀오라고 하는 아내에게 어떻게 너를 두고 혼자 다니냐 말만 하고 병든 아내를 두고 나온 김첨지의 심정으로 집을 나섰다. 오늘은 ‘바투 동굴’에 간다. 지하철을 타고, 기차도 갈아타야 하는데 구글 지도가 있어 조금만 헤매면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다. 거대한 석회동굴인 바투 동굴은 유명한 힌두교 성지다. 어제 봤던 ‘스리 마리아만’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힌두교 사원은 아름답고 현란하며 요란하다.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을 몽땅 때려 넣은 느낌이다. 아직 인도는 못가봤지만 소란스럽고 잡다한 인도의 이미지가 힌두에서 왔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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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 들어가려면 272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무지개색으로 아름다운 계단은 원숭이 배설물과 온갖 쓰레기로 지저분하다. 동굴 입구에는 높이 42.7미터의 거대한 황금 동상이 서 있다. 힌두 전쟁의 신이라고 한다. 계단과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부탁하는 커플에게 사진을 찍어준다. ‘웨어 아유 프롬?’ 물으니 ‘코리아’. ‘아? 한국분이셨어요?’ 한바탕 웃는다. 272개 계단을 오르는데 왼쪽은 과거의 죄, 중앙은 현재의 죄, 오른쪽은 미래의 죄를 씻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죄를 참회하기에는 계단이 무척 야단스럽다. 원숭이들이 날뛰며 관광객들을 위협하고, 소지품을 노린다. 재미 삼아 바나나나 과자를 던져주는 사람들이 많다. 학습된 원숭이들은 인간을 식량창고로 여기고 노략질한다. 물을 빼앗아 뚜껑을 돌려 여는 모습에 감탄이 나온다. 작은 새끼 원숭이를 배에 달고 젖을 물리며 달리는 어미 원숭이가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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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바투 동굴이다. 높은 천장에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동굴이다. 턱을 들어 웅장하고 거친 동굴 벽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 파란 하늘에서 빛이 쏟아진다. 처음 동굴을 발견한 이들은 대자연에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건 신의 작품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섬기는 신의 성지로 만든 게 십분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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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열차 중앙에 노약자, 장애인, 임신부 등을 위한 우선 좌석(priority seat)이 있다. 우리나라는 열차 구석에 배려석이라는 이름으로 있지 않나. 배려석은 당사자를 배려의 대상으로 보는 비당사자 중심의 언어인데 ‘우선 좌석’은 당사자 중심인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숙소 근처 쇼핑몰에 들러 날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위해 빵과 간식을 바리바리 샀는데 갑자기 폭우가 내렸다. 숙소까지 500미터 거린데 택시는 24,000원을 부르기에 홀딱 비 맞으며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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