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하고 세계여행 15
오토바이가 점령한 복잡한 도로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야자수와 파초로 울타리를 두른 흰 집이 나온다. 대문에 붙은 도마뱀이 호다닥 도망가고, 새 소리가 아침을 깨우는 그림 같은 집. 우리는 여기서 한 달을 살았다. 고풍스러운 나무 문을 당기면 하얀 타일이 깔린 널찍한 거실이다. 거실 오른편에는 통창으로 바깥 풍경이 훤히 보이는데 온통 초록 논이다. ‘라이스 필드’라 불리는 우붓의 명물이다. 논밭이야 우리나라에도 볼 수 있지만 삼모작을 하는 이곳에서는 언제나 초록 들판이다. 삿갓 쓴 이웃 농부가 낫 한 자루를 들고 추수를 한다. 한 달 동안 농부는 꽤 넓은 면적을 낫 한 자루로 추수했고, 옆의 논에서는 또 그만큼 초록 벼가 자라났다 매일 생명이 자라는 게 보였다. 거실 바닥에 누우면 초록의 논 위로 새파란 하늘이 넓게 보이는데 흰 솜사탕 적란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가장 채도가 높은 파랑, 하양, 초록, 세 가지 색만 있으면 여기를 그릴 수 있겠다. 가끔 나는 아내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흘러가는 구름을 함께 보았다.
실에는 TV와 소파가 있어 편하게 쉴 수 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낮잠을 잤다. 넷플릭스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를 틀어놓고 요가를 따라하기도 한다. 거실 왼편에 마련된 주방에서는 간단한 요리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거의 끼니를 해결했다. 환기를 하려고 주방 창을 열면 거대한 파초 잎이 주방 안으로 빼꼼 들어온다. 파초 잎 아래에는 가끔 달팽이가 붙어 있었다.
나무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가면 화장실과 침실이 나온다. 화장실은 넓고, 깔끔하다. 저녁이 되면 냄새가 조금 올라오긴 하지만 동남아니까 이해해본다. 침실에는 네 귀퉁이에 기둥이 있고, 천장과 캐노피가 있는 흰색 침대가 있다. 매트리스가 적당히 푹신해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지저귀는 새소리가 아침을 열었고, 왼편과 오른편 벽에 있는 여닫이 창을 열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흐르는 게 보이는데 어떤 그림보다 아름다운 액자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삐걱삐걱 침대 기둥이 흔들렸다. 꽤 큰 규모의 지진이었다. 그러고보니 발리는 환태평양 불의 고리 한복판이다. 덜컥 겁이 나 지진 경보 앱도 설치하고 여진이 있을까봐 긴장했는데 아내는 태평하다. 무릇 걱정 인형과 대범이가 좋은 여행 파트너인 법이다.
이층에는 베란다가 있다. 이곳에는 노란 소파가 있는데 오후 5시쯤 여기에 앉으면 환상적인 노을쇼가 시작된다. 하늘은 매일 어김없이 아름다운 노을을 보여주었고, 우리는 재미있는 영화를 감상하듯 시간이 되면 이 소파에 앉는다. 매일 노을을 봐서 소파가 노래졌나 생각했다. 밤에는 꼭 비가 내렸다. 쏴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소리의 비다.
집 바로 옆에는 수영장이 있다. 네 가구가 함께 쓰는 수영장인데 이용객이 거의 없어 우리 전용 수영장이나 마찬가지. 수영장에서도 역시 초록이 가득한 논밭이 보인다. 우리는 물속에서 노을을 보는 것도 좋아했다. 낮에는 햇살이 너무 뜨거우니. 수영을 하다 시선을 돌리면 역시 논밭이 펼쳐지고 그 끝에는 폭죽 같은 야자수 몇 그루가 있다. 거기부터는 깊은 계곡과 밀림일 것이다. 저녁이 되면 박쥐와 새들이 부산하게 난다. 먹이활동을 하는 시간인가 보다. 하늘을 마주하고 누워 물에 잠기면 하늘도 새도 박쥐도 얼룩이 진다. 이 놀이가 재밌어 아이처럼 계속 물에 몸을 띄우고, 또 가라앉고 했다. 한량처럼 수영장에서 저녁을 보내면 괴로웠던 일들이 사소해졌다. 스트레스로 피폐해진 나날들이 깨끗하게 정화된 느낌이었다. 쉼이란 맑은 맑고 넉넉한 물인 것 같다. 오염된 일상이 스포이드로 방울방울 떨어질 때 우리는 충분한 쉼으로 삶을 정화할 수 있다. 어둠이 내리고 별이 총총 빛나기 시작하면 풀벌레들이 아카펠라 공연을 한다. 남김없이 행복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