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하고 세계여행 14
유쾌한 가이드와 택시 투어하기
택시를 타고 온종일 남부지역을 관광한 뒤 우붓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다음 숙소인 우붓까지 이동하려면 어차피 택시를 타야하기에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제시하고 비용을 협상하는 택시투어가 합리적이었다. 카페에서 추천을 받아 에디라는 가이드를 불렀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에디는 시종 유쾌했다. 발리의 문화와 역사, 가볼만한 곳, 맛있는 음식 등을 소개해 주었다. 축구 이야기를 하면서 금세 친해졌는데 당시 신태용 감독이 인도네시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무려 한국을 이긴 참이어서 할 이야기가 많았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웨얼 아유 프롬’ 묻고는 그토록 반갑고 친절하게 대해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타나 롯(Tanah lot) 사원. 발리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긴다는 해상 사원이다. 16세기 자바 섬에서 건너온 ‘나리타’라는 고승이 바다에 솟은 바위를 보고 “여기야말로 신들이 강림하기에 좋은 곳이다”라며 지은 사원이라고 한다. 바닷길이 열리는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고, 사원 옆 동굴에는 검은 뱀이 살고 있어 바다로부터 오는 악령을 쫓아준다고 한다. 힌두교에는 10만이 넘는 신이 있고, 발리에는 그만큼의 사원이 있어 발리 여행은 곧 사원 여행이기도 하다. 발리 사원은 하늘로 뻗은 화려하고 섬세한 곡선이 특징인데 색은 오직 먹색이어서 소박하고 차분하다. 특히 사원 입구는 삼각형의 탑을 반으로 가른 후 좌우로 당겨 대칭을 이루는데 영적인 공간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더한다. 이를 찬디 벤타르(Candi Bentar)라고 한다.
타나 롯의 찬디 벤타르에 다다르면 대칭 사이로 파란 바다가 나타난다. 수평선 위에는 흰 구름이 떠 있고 하늘은 바다보다 옅은 채도로 칠해져 있다. 사원을 구경하고, 잘 꾸며진 해상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몹시 더웠지만 눈은 시원했다.
다음 코스는 짐바란 수산시장이다. 교통체증이 어찌나 심한지 27km를 가는데 2시간이 걸렸다.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좁은데 오토바이와 차가 마구 뒤엉켜 도저히 속도를 낼 수 없다. 오토바이들이 차의 왼쪽 오른쪽으로 추월해 가는데 중앙선을 넘거나 좁은 인도에 올라탔다가 내려가기 일쑤다. 오토바이가 넘어지는 걸 두 번쯤 목격했다. 지금껏 봐온 도로 중 발리가 가장 혼잡하다. 에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우리는 저걸 킬링머신이라고 불러. 웬만하면 타지마."
짐바란 수산시장에서 해산물을 고른 뒤 에디가 추천한 식당에서 요리를 부탁하기로 했다. 좁고 어두운 수산시장은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해산물 상태를 잘 봐야 해. 잘못 먹으면 탈 날 수 있어. 아이스박스나 얼음이 가짜인 경우가 많아.” 에디의 말이 떠올랐다. 발리밸리라 불리는 이곳 배탈에 대해 익히 들었기 때문에 그나마 얼음이 많고 신선해 보이는 곳에서 새우와 생선을 적당히 샀다. 에디는 우리를 데리고 다시 식당으로 데리고 가 주인과의 통역을 담당한다. 조리법은 구이로, 버터갈릭을 적당히 뿌려달라고. 그는 오늘 우리의 기사님이자 통역 담당이다. 바다가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다가온다. 학교 조별 과제인지 인터뷰를 해줄 수 있냐고 묻는다. “나 영어 잘 못해.” 진실된 고백에도 아이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졸지에 인터뷰이가 되었다. 여학생들은 휴대폰을 들고 녹화하고, 안경 쓴 수줍음 많은 남학생이 내게 묻는다. “발리에는 처음인가요? 어디를 가봤어요? 어디를 추천하고 싶어요?” 자기 나라 여행 중인 외국인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심정인가보다. 영어 실력이 들통났는지 질문이 그게 다였는지 인터뷰는 빨리 끝났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색하는 아이들이 귀엽다. 유쾌한 만남을 마치고, 잘 손질되어 온 진수성찬을 즐긴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는 요리에 기분이 좋다.
분명 점심을 먹은 건데 오후 5시가 다 되어간다. 에디는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고 야단이다. “이제 그거 먹고 배탈 안 나면 무얼 먹어도 괜찮을거야.” 아찔한 덕담에 웃음바다가 된다. 역시나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속도가 나지 않는다. 가보고 싶은 곳은 많지만 선택과 집중을 해야만 한다. 우선 빠당빠당 비치로 간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나와 유명해진 해변이다. 입장료를 내고 좁은 동굴을 내려가면 정말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빛을 따라 동굴을 나오면 비밀스러운 해변이 펼쳐진다. 장엄한 석회 절벽이 날개처럼 해변을 감싸고 있어 묘한 안정감을 준다. 사람들은 해변에 누워 쉬거나 물놀이를 하고 있다. 해 저가는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저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평온한 감상에 빠지기에 우리는 시간이 부족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그 장소와 분위기를 온전히 즐기는 편인데 하루가 짧은 게 아쉬웠다. 급하게 다음 장소인 술루반 해변으로 이동했다. 술루반에 도착해 굽이굽이 언덕을 내려가면 역시 동굴 사이로 해변이 나온다. 이곳은 넓은 모래사장이 없고 바로 바다에 맞닿아 있다. 해가 넘어갔는데 아직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늘은 일몰 후에도 한시간 정도는 빛난다. 아주 환상적으로.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동굴 사이로 붉은 하늘과 이를 담은 파도가 넘실거렸다.
완전한 어둠이 내린 후 우붓으로 간다. 교통체증으로 도로에서 보낸 시간이 반이 넘었던 투어였다. 에디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대단한 운전 실력을 뽐낸다. 아찔한 도로 상황에 내가 놀랄 때마다 “와하하하! 디스 이즈 발리!”라며 호쾌하게 웃던 그. 덕분에 안전하게 우붓에 도착했다. 온종일 스파르타식 영어 회화에 다소 피곤했지만 어쨌든 친절은 기분 좋은 것이다. 에디는 우붓의 명소들을 소개해 주고, 다음 목적지인 길리로 가는 방법까지 안내해 주었다. 축구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그날 밤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인도네시아 대 이라크와의 경기가 있어 꼭 이기기를 바란다고 응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