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하고 세계여행 26
전날 워터블로우에서 바다의 물폭탄 쇼를 감상한 대가가 혹독했다. 높이 솟아오른 파도를 쏴아 폭포수처럼 맞았는데 숙소에 돌아와서 보니 휴대폰 충전이 되지 않는다. 며칠 전 길리에서 스노쿨링할 때도 방수팩에 바닷물이 들어가 폰이 잠겼었는데 이거 심각하다. 충전 포트를 계속 말려도 보고 생수에 담가 씻어도(?)봤는데 아무래도 부식된 것 같다. 이물질이 감지되었다는 알람이 뜨며 당장 충전기를 포트에서 빼라고 삐익삐익 무시무시한 경고음이 울린다. 결국 아내의 조언에 따라 휴대폰을 끄고 내일 덴파사로 나가 수리점에 가보기로 했다. 문제는 내 폰에만 현지 유심을 장착하고, 아내는 핫스팟으로만 다녔는데 내 폰이 꺼지면 우린 정말 스마트폰 없이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
맹그로브숲에 가볼까 했는데 데이터가 안되니 어딜 가기 어렵다. 와아파이가 되는 숙소에서 근처 가볼만한 곳을 찾는다. 세계여행 70일이 넘으니 짧게 자르고 출발했던 머리가 많이 자랐다. 미용실을 찾아간다. 외국에서 머리를 자르면 어떤 느낌일까.
역시나 유쾌한 얼굴의 사장님 등장. 이름은 역시나 넷 중 하나다. 형제 중 넷째인지 이름은 끄뚜. 앞, 뒤, 옆 모두 짧게 잘라달라 했다. 끄뚜는 다시 안 올 이방인의 머리를 심혈을 기울여 아주 천천히 잘라준다. 한국에서는 미용실에서 한마디도 안 하는데 여기선 끄뚜와 한참을 수다 떨었다. 렘봉안 맛집과 명소도 소개받고,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도 묻는다. 발리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그들의 은근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관광으로 먹고 살지만 관광객에게 비굴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과장이나 허세 없이 조곤조곤 설명해준다. (물론 한 달이 넘어가며 이러한 화법의 결론은 투어든, 택시든 ‘머니’라는걸 알게 되었지만)
머리를 자르고, 파노라마 포인트까지 걸었다. 대부분 오토바이로 움직이는 이곳에서 보행자는 우리뿐. 길은 역시 좁고 험했다. 인도네시아에 인도 따위는 없다. 걷다 보니 수풀 뒤 허름한 공동묘지가 나온다. 낡은 비석마다 색색 우산을 씌어두었다, 더워서 그늘을 만들어준 걸까 비 맞지 말라는 배려일까. 힌두교 전통으로 볼 때 아무래도 가묘인 것 같다. 이들의 가족들은 돈을 모아 바다로 가는 장례를 다시 치르고 싶을 것이다. 소박하고 신성한 이들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모기를 쫓으며 파노라마 포인트에 도착했다. 렘봉안에서 가장 높은 언덕인 것 같다. 바다 건너 발리 섬의 아궁산이 보인다. 3,000미터 넘는 고산이다. 발리에 있을 때는 오히려 아궁산이 잘 안 보였는데 길리나 렘봉안에서 그 위용이 잘 보인다. 너무 커다란 존재는 가까이서는 잘 못느끼는 모양이다. 조금 멀리서 봤을 때 더 멋있는 존재가 분명 있다.
돌아오는 길. 쓰레기가 많이 보인다. 와 저 물병좀봐. 그러고 보니 이 작은 섬에 전기나 수도는 어떻게 들어오는거며 쓰레기들은 어떻게 처리되는거지? 이 아름다운 바다와 해변에도 조금만 둘러보면 쓰레기가 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