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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통한 엿보기와 결핍 채우기

클라우스(19)와 윌러비(20) 이야기

by 기록

월러비 가족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투성이입니다. 학자, 장군, 모험가, 왕까지 한 윌러비 가족은 위대한 업적을 쌓은 가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윌러비 가족의 특징은 여성까지도 나는 콧수염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윌러비 저택에 살고 있는 아빠와 엄마를 보면 전혀 위대하지 않습니다. 위대하다는 것을 정신과 신체로 나눴을 때, 일반인들이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뎌내거나 일반인들이 하지 못할 물리적으로 큰 힘이 들어가는 일을 해 냈을 때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 '엄마'와 '아빠'는 자신들의 만족만을 위해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일본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한 부자였던 간송 선생님은 자신이 가진 재산으로 한국의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셨고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부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체적인 면은 없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일반인들이 인내하지 못할 일을 지속하셨기에 이런 경우를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친에 대한 언급이 없고 엄마는 빨강 머리를 했지만 콧수염이 없으니 윌러비 가문 외부에서 온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는 윌러비 가문 사람으로 빨간 콧수염이 잘라도 잘라도 계속 나와서 엄마는 이 콧수염을 잘라서 스웨터를 짭니다. 엄마와 아빠의 경제 활동에 대한 내용이 없기에 아마도 엄마와 아빠의 수입원은 이 코털로 짠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는 이전에 위대한 선조들이 남겨준 재산을 활용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나오는 인물들 중 '엄마'와 '아빠'는 인물 이름이 없이 '엄마'와 '아빠'로 불립니다. 이러한 방식은 익명성을 바탕으로 합니다. 익명성의 전제는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다는 개방성입니다.

또한 위대한 윌러비 가문의 선조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도에 걸린 선조들의 사진 중 학자는 기존에 있는 것들에 대하여 정리하여 정립하고 있는 사람으로 과거를 잘 아는 사람. 장군은 문이 아닌 무력 부분에 대해 잘 아는 사람. 모험가는 알려지지 않은 것을 개척해서 새로운 앎을 추구하는 사람. 왕은 모든 사람들과 차별되는 군림하는 사람 등을 의미하며 윌러비 가문의 위대함을 여러 측면으로 보여주고자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윌러비 가문이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 보여주지 않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첫째 남자아이, 둘째 여자아이, 막내(성별 모르겠음. 일란성쌍둥이) 둘을 둔 네 아이의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본인들만 먹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모가 식사 중인 식탁에서 음식을 훔칩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첫째가 모든 책임을 지고 지하 석탄 창고에 갇힙니다. 얼마나 자주 갇혔는지는 석탄 창고 안에 그어진 감옥에서 쓸 법한 날짜 표시 빗금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네플리스란 세계적 영상 서비스에 등재되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많은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이 애니에 대하여 기획을 올렸을 것이고 감독은 많은 애니메이터와 성우들을 모집하여 팀을 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온 작품을 가지고 마지막 평가도 거쳐서 이 작품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온 이야기가 현실과 관련된 것은 도시 속 저택이란 정도이지 나머지는 현실의 사고로 받아들이기에 모두 이상한 이야기 투성이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문학 특유의 성격을 고려하여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흔히 문학적 표현이라고 한다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문학적 성격이 가장 부족하고 비유적 표현을 썼을 때 직접 말하기와 다른 느낌을 받으며 이를 명시적으로 말할 때 '문학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경험을 고려한다면 '문학적'이란 것은 많은 사례가 있겠지만 우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표현에 대한 이해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윌러비 이야기에서 필요한 것도 현실의 논리가 아닌 상상력 다르게 표현하면 환상의 논리가 작용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환상의 논리는 현실의 논리와 다른 차원으로 동시에 작용하여 보는 이가 보는 동안에 현실의 논리에서 점차 멀어지게 되고 환상의 논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이질감은 사라지고 잠시 해방감과 재미를 느끼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일상에서 요구받지 않는 상상력을 자극할 것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서 환상의 세계를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는데 도중에 현실의 세계를 가져오면 윌러비의 세계는 당연히 깨질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선택한 사람들은 환상적인 것을 선호하고 그래서 이런 애니를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 봅니다. 만약 이러한 환상성보다 현실성을 더 중시한다면 계속 어긋난 세계로 들어오라는 소리가 짜증만 유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애니 도입부에서 멈추고 다른 영상을 찾을 겁니다.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윌러비 가족에게 평범하지 않은 일이 생깁니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사랑한다며 연이은 애정 행각을 계속 하지만 자식들을 버려둔 채로 옷도 먹을 것도 부족한 채로 집에 방치해 두고 학교도 보내지 않는 것이 일상입니다. 이런 가정에 어느 비 오는 날에 누군가 대문 앞에 무엇인가 놓고 갑니다. 그것은 아기 바구니였습니다. 이 아기를 계기로 네 남매는 집에서 쫓겨납니다. 아이를 싫어하는 윌러비 부부에게 가장 어린아이인 아기는 극도로 싫어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집을 나와 아기를 다른 곳에 두고 돌아가려고 여기저기 다닙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들리게 된 과자공장 앞에다가 아기를 두고 갑니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부모님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고아가 되자고 네 남매는 의견을 모읍니다. 고아가 되기 위해 부모님을 사고 사하게 만들고자 여행사 팸플릿을 가장하여 가장 위험한 지역만 골라 세계여행 가이드를 만듭니다. 부모님이 죽으면 고아가 되고 그러면 이전과 달리 윌러비 저택에서 네 남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가이드북을 우연히 '엄마, 아빠'의 눈에 들게 하여 '엄마 아빠'는 자식들을 보모에게 의뢰한 후 여행을 떠납니다. 보모와 함께 하면서 갈등도 있고 오해도 있어서 잠시 남매들과 보모 모두 헤어졌지만 짧은 만남 속에도 따뜻함이 있었기에 오해는 풀리고 서로 함께 모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 느낀 점이 있는지 네 남매는 부모님이 사고사 당하게 할 여행을 떠나도록 한 것을 다시 생각하고 '엄마 아빠'의 목숨을 구하고자 힘을 합칩니다. 그들은 사탕 공장(아이를 맡긴 곳. 아이를 인연으로 사탕공장 사장님과 친해진다.)의 비행선을 훔쳐 부모님을 구하러 알프스로 갑니다. 네 남매는 눈보라로 동사하기 직전인 부모님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감동하여 네 남매와 함께 이전과 다른 삶을 함께하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둘만 생각하는 '엄마'와 '아빠'는 네 남매를 눈폭풍이 몰아치는 알프스에 버려두고 네 남매가 타고 온 비행선을 빼앗아서 타고 갑니다. 하지만 비행선을 몰아본 경험이 었으니 가다 사고가 납니다.(이후 엔딩 장면에서 바다에 빠져 상어 입으로 끝나 먹혔다는 암시를 줍니다.)


윌러비 가족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됩니다. 우선 도심 속 오랜 시간 존재한 윌러비 저택은 전통 또는 쇠퇴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엄마'와 '아빠'의 둘만의 애정 행각과 아이 돌보지 않음은 윤리를 저버린 행동이지만 뉴스를 보면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문제로 실제 어린아이가 죽은 사실도 있습니다.

네 남매에게 닥친 위기는 부모님이 집을 판매하여 갈 곳이 없는 상황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엄마'와 '아빠'는 결국 상어에게 죽고 윌러비 네 남매는 보모와 사탕 공장 사장님과 버려진 아이 그리고 네 남매가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둘째 여자아이의 코털이 남을 통해서 윌러비의 전통은 이어지고 여자 아이 또한 첫째에게 자신의 코털을 자랑함으로 윌러비 가문의 특징을 좋아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현실과 거리 있는 환상적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보게 만드는 것은 무조건적 환상이 아닌 현실과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고 환상적인 부분은 환상 나름의 논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윌러비 이야기는 환상의 논리를 보이기에 지켜보게 됩니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남녀의 성적 욕구 해결을 위하여 결혼을 하는 경우가 현실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없이 아이를 방치합니다.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부모를 둔 윌러비 남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평범하지 않은 상황 속 특별한 능력 때문으로 보입니다.

첫째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어떻게든 부모와 남매들 사이를 멀어지지 않게 하려는 희생정신과 인내심이 있습니다. 둘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고 노래를 잘 부릅니다. 버나비 쌍둥이는 윌러비 저택 내 있는 모든 책들을 다 읽고 무엇이든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윌러비 네 남매의 평범하지 않음은 이 이야기 이전에 있던 영웅 이야기의 구조와 유사해서 수용하기 수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옛날부터 들어왔던 이야기의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계속 지켜보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이야기 문법, 구조 관점)


선은 자신의 길을 찾고 만들어 간다면 악은 남의 것을 빼앗습니다.

선악의 대립에서 선이 항상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은 권선징악의 의도 작용만이 아니라 선이 창조하고 악은 창조를 할 수 없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윌러비 이야기에서도 이러한 논리가 작용된다고 봅니다. 이 작품에서 선악의 대립은 부모와 자식, 고아 협회와 네 남매+ 보모 정도의 구도로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삶을 창조해 나가고자 하고 결국에는 자신들이 원하는 가정을 버려진 아기와 사탕가게 사장님과 보모하고 이룹니다. 고아 협회는 보모가 고아였다는 것을 가지고 낙인을 찍고 새로운 가정을 이루려는 과정을 방해합니다. 이 두 번의 갈등은 가정 내의 갈등과 사회적 갈등으로 보입니다. 갈등의 크기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점차 커지는 것입니다. 두 갈등을 해결했을 때 네 남매는 부모에게 의지하는 아이들이 아닌 조금 빠르게 어른이 되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자식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부족하게 제공하고 잘 곳은 제공했지만 '주'의 의미가 안정의 욕구를 충족시켜준다는 특성을 고려할 때 온전한 '주'의 제공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도 부족하여 나중에는 네 남매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윌러비 저택을 팔아버립니다. 본인들의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는 네 남매 또한 윌러비 가문임을 고려한다면 가문의 전통성을 무시하고 아이들의 가문에 대한 권리를 빼앗은 행동이라고 봅니다.


문학은 결핍된 것을 상상으로 채워주는 기능이 있다고 봅니다. 윌러비 가족에서 보이는 '엄마'와 '아빠'는 두 사람이란 경계만 설정하여 서로에게만 집착하는 현대인의 여러 모습 중 하나를 보여줍니다. 사회의 결핍된 모습을 애니를 통해서 보여주고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부모님을 죽이려는 패륜적 행동은 표현 방식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명료하게 말하면 '네 남매가 부모님을 죽이기 위해 사고사를 위한 살인 계획을 세웠지만 마음을 바꿨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애니를 보는 과정에서는 네 남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응원하고 '엄마'와 '아빠'의 죽음에 대하여 안타까움은커녕 잘 되었다는 위안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현재 사회에 부족한 '가족의 의미'를 제시합니다. 혈연이 아닌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그러한 가족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애니이지만 윌러비 이야기에서 일부러 비현실을 이용해서 현실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장치가 작용한다고 봅니다.


이 이야기의 말하는 내용. 유대감, 가족, 관계에 대한 의문은

산타클로스의 기원을 만든 애니 '클라우스'와도 관련성을 보입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분석적 관점에서 가장 뒤로 빼서 이야기를 합니다.

윌러비 가족에서 가족애가 사라진 문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가족 구성 당시에 엄마와 아빠만 있고 둘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네 남매를 버려두는 상황을 고려하면 엄마와 아빠는 자신들만 아는 이기적인 인물이며 책임감이 없습니다. 그러한 천성 때문에 네 남매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네 남매의 갈등은 부모라는 천륜을 지키느냐 아니면 세상에서 보내드리느냐일 것입니다.


한편으로 복도 가득 위대한 조상들 사진을 둠을 통해서 나타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는 가문 외부 사람인 엄마의 유입으로 인한 변화 가능성도 제시할 수 있을 듯합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현상이 일어난 과정만 분석한다면 과거 비합리적으로 가문 내로 홀로 옮겨 온 여성분들이 탄압을 당하고 관련성이 없는 일에도 책임을 강제받은 이유는 이 윌러비 가족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매우 뛰어난 가문이고 해당 가문에는 위대해 지기 위한 대한 보이지 않는 문화적 자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화적 가풍이 외부에서 온 엄마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근대 이전 시기에 여성에게 비합리적 책임을 지우는 이유는 여성이 남성의 가문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가문 내의 규칙이 작용하는데 여성이 들어오면서 변화가 생기니 그것에 대한 민감한 반응의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또는 유대감 측면에서 가문 내에서 유대감은 공고하지만 중간에 들어온 여성에 대하여 이 유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유라고 봅니다. 당연히 그러한 가족 구성원이 되는 사람에 대한 배척은 문제 되는 행동임을 인지하고 있지만 윌러비 가족을 보고 나서 과거 시대에 대하여 대입을 해서 생각을 해 본 것이고 사고의 유연성 측면, 인물에 대한 이해 측면으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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