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꽁치킬러 Dec 01. 2021

깡술이 일상인 사람들

스위스의 음주 문화

나는 술을 못한다. 겸손 차원의 발언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음주 활동이 거의 불가하다. 알콜 분해하는 효소가 조상 대대로 아예 퇴화한 게 아닌가 싶다. 맥주 반 잔에 알딸딸해지고, 한 잔을 다 마시면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된다. 겨우 맥주 한 잔 마셨을 뿐인데 주문한 술 혼자 다 마신 것처럼 보이는 비주얼이다.

이런 태생적 한계로 술을 멀리하는 나완 달리, 스위스 사람들은 모든 일상에 술이 함께 하고, 집집마다 다양한 술과 그 술 종류에 맞는 고유 술잔을 기본적으로 구비해놓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널리 마시는 술은 와인이다. 1999년 자료에 따르면 60%이상의 스위스 사람이 매일, 혹은 주마다 와인을 마신단다. 우리나라를 비롯, 세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스위스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그 역사가 길고 맛이 매우 훌륭하다. 너무 맛이 좋아서 자기네끼리만 다 먹고 수출은 겨우 1%만(그것도 대부분 독일로만)한다. 이러니 외국에선 평소에 스위스 와인을 맛볼 일이 없는게 당연하다. 

덕분에 와인은 팬 층도 엄청 두텁다. 일단 우리 시아버지. 당신 댁으로 식사 초대 하실때마다 항상 와인을 권하시며, 엄청난 와인 팬이라 집 지하실에 와인을 500병 가까이 쌓아두고 계신 이 분은 점심 식사 때에도 와인 반주를 절대 거르지 않는다. 일 년에 두 번, 취리히 호수에 대형 유람선을 띄워 놓고 2천 여 종의 와인을 맛보는 대규모 와인 테이스팅 행사에도 꼭 참가하셔서 온갖 종류 와인을 다 맛보고 십여 병씩을 구매하시곤 한다.

와인 뿐만이 아니다. 고흐나 로트렉 등 유명 예술가의 영감을 자극한 술로 유명한 '압생트Absinthe'는 18세기 스위스 뉴샤텔 지방에서 유래하여 지금도 판매된다. 독일 원산이지만 스위스 곳곳에서 생산하는 독한 브랜디, '키르쉬Kirsch'도 있고, 이탈리아에서 유래했으나 스위스 전역에서 마시는 '그라파Grappa'도 있다. 특히 이 키르쉬와 그라파는 집집마다 한 병씩 꼭 있는 술이다. 키르쉬는 케익에 넣어 굽기도 하고, 퐁듀에 찍어 먹기도 하는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전통주도 많다. 우리 시어머니는 술을 아주 즐기진 않으시지만 스위스 전통주에 애정과 호감을 갖고 계신데, 시어머니가 특히 좋아하시는 술은 스위스 아펜첼 지역에서 나오는 전통주 '알펜비터Alpenbitter'로서, 그 맛은....아가들이 해열제로 먹는 시럽형 감기약을 100배 정도 농축한 맛이라 해 두자. 실제로 목이 아프거나 감기 증상이 있을 때 효과가 있다(고 시어머니는 굳게 믿고 계심).

이것이 바로 아펜첼 알펜비터-국간장 아님 주의

스위스 사람들의 맥주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사람들은 흔히 독일 맥주가 최고인줄 알지만, 스위스 맥주도(또 자기네끼리만 먹느라 수출을 안해서 그렇지) 맛이 훌륭하다. 난 술알못이지만 모르는 내가 먹어봐도 맥주 맛은 스위스가 훨씬 좋게 느껴진다. 독일 수질이 워낙 후져서 물 대신 마실 걸 찾다가 맥주 만드는 문화가 발달했다는데, 스위스는 물 맛이 좋기로 유명한 나라라 그런지 맥주도 참 맛있다. 스위스 곳곳마다 지역 맥주가 있는데, 취리히 지역에서 가장 맛있다고 여겨지는 맥주로는 '콥프압(Chopfab-*발음 주의! '좁밥'아님)'을 들 수 있겠다. 독일어로 '머리'라는 뜻을 지닌 단어 'Kopf'를 스위스 사투리인 'Chopf'로 적고, 거기에 '제거'의 의미를 지닌 접두어 'ab'을 붙였다. 한 마디로 '머리통 날아갈 때까지 술을 먹자'는 원대한 포부를 반영한 이름. 

다양한 맛과 함께 머리통이 날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콥프압'

한국은 술을 마시면서 기름진 안주를 먹는 문화가 발달했는데, 이곳에선 순수하게 '깡술'을 마신다. 안주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술이랑 술잔만 딸랑 놓고 마신다. 알콜 분해 효소가 최적으로 발달한 게르만족이어서 그런지 깡술만 술술 마셔도 다음날 아무렇지 않다. 신랑은 20대 초반에 혼자 맥주 5리터를 마셔본 적도 있다고 했다. 지금도 친구들을 초대하면 맥주는 기본적으로 1인당 10병씩 깐 뒤 입가심(?)으로 그라파나 키르쉬, 위스키를 한 잔씩 마시고, 와인 한 병을 열면 (내가 협조를 하고 싶어도 못 하는 탓에)혼자 750밀리미터 한 병을 다 마신다. 그냥 뚜껑 덮어놓고 다음날 마시라고 하면 '그건 술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한다. 

물론 한국에도 술부심 부릴만큼 잘 마시는 사람들이 많고 밤 늦은 시간엔 여기저기서 취객도 많이 보이지만, 여기에서는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몸을 못가눌 만큼 취한 사람을 보기 힘들다. 체질적 특성도 있으나 술을 취할만큼 마시지 않는 문화도 한 몫 하고, 펍 등에서 사먹는 술이 비싸서(!) 취할 때까지 마실 수 없는 이유도 있겠다. 그래서 대부분 집에 손님을 초대해서 얌전히 마시거나, 밖에서 마실 땐 기분 좋게 마시고 다들 잘 알아서 집 찾아 들어간다.

스위스의 술은 한국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미지의 영역이지만, 지역 별로 워낙 유명한 술이 많은 곳인지라 스위스를 여행할 기회가 있을 때 그 지역에서 이름난 술을 찾아 마셔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고통의 근원, 스위스 저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