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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뭄씨 May 30. 2023

14주차. 남과 여(2) 성별힌트, 헤어질 결심

둘째 딸내미, 잘해봅시다



 추억의 문방구 앞.

 형형색색 캡슐 룰렛머신, 이른바 ‘뽑기’ 앞으로 아이들이 동전을 짤그락거리고 서있습니다. 동전 100원을 능숙하게 장전하고, 레버에 손을 올려놓습니다. ‘딸깍’ 적당한 저항감이 손끝에 실리면 오케이. 톱니바퀴가 맞물려 운명의 주사위가 돌아갑니다.


 당시 7살 난 저는 출동 지구특공대 '반지 뽑기’ 앞에 서있었습니다. 만화 지구특공대 주인공들이 착용하는 이 반지는 ‘땅’, ‘불’, ‘바람’, ‘불’, ‘마음’ 5개의 요소를 상징했는데, 반자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초능력이 달랐습니다. 이때 저는 ‘바람’이랑, ‘물’이 뽑히길 바라며, 온 세상의 기운을 100원에 실어 넣었던 찰나입니다. 바람과 물의 기운이 깃든 반지를 뽑으면 친구들과 ‘출동 지구특공대’ 놀이에서 여성캐릭터 역할을 맡을 수 있었거든요.      


  동그란 플라스틱이 또르르 떨어집니다.

  톡! 캡슐이 반환구를 노크하면 성급하게 문을 열어 환영합니다.      


 “얘는, 땅이야!”     

 내가 확인도 하기 전에 옆에 있는 친구가 투명한 플라스틱 사이로 내 반지가 무엇인지 별안간 외칩니다. 내가 원했던 반지가 아니라 김이 샜습니다. 플라스틱 캡슐을 신경질적으로 밟아 깨버립니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윽고 저는 바닥에 떨어진 빛나는 땅 반지를 툴툴 털어 장착하고는 ‘내가 일등이야!’ 하며 친구들 사이로 스며듭니다. 그러곤 ‘출동 지구특공대’의 실질적 리더는 나라고 주장하며, 완벽한 ‘땅’ 캐릭터로 놀이에 임합니다.



 


 

  문득 이 억의 '뽑기'가 성별을 확인하는 순간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4주. 초음파를 바라보며 유난히 숨죽이던 그 날,

  저는 다리 사이로 묘한 것이 보이는 것 같아 ‘설마’ 저것이 그것인가, 이번엔 아들인가, 하고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찰나였습니다. 별안간 치고 들어오는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

  “앞에 아무것도 없네요”

 

 두 번째 ‘딸밍아웃’입니다.     

 선생님이 성별힌트를 공개의 그 순간은 진실이 예고도 없이 문풍지를 찢고 나오듯이 난데없고 갑작스럽습니다. 오늘 쯤 들을 수 있겠다 충분히 예상했지만 ‘훅’ 치고 들어옵니다. 앞으로 가족의 미래나, 전반적인 톤을 결정짓는 순간인 것을 의사선생님은 아시는 지 모르시는 지, 연필선이나 밑그림 없이 과감한 잉크 선으로 터치하듯 공표해버립니다.      

  진료실을 나오는 순간 남편과 저 사이에 약간의 미묘한 어색함이 흘렀습니다.

  “와... 나는, 다리 사이에 뭐가 있는 줄 알고 긴장했었는데 딸인 가보네”

  “오! 맞아 맞아, 나도 아들인 줄 알았어.”

  먼저 침묵을 물려준 남편의 넋두리가 반가워 공연히 밝은 톤으로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절묘하게 본론은 피하고 피상적인 감정만을 공유합니다. 사실, 우리 둘은 딸이 좋다는 모종의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치면 오늘의 ‘딸밍아웃’은 희소식입니다. 그러나 왠지 곧바로 우리의 ‘딸 사랑’을 노골적으로 밝히는 것이 속물 같았던 탓도 있었지만, 저의 경우는 마음 깊은 곳에 헛헛한 마음을 몰래 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겐 비밀이었지만.     

 

 “전, 사실 딸 낳는 게 보장만 된다면 당장에라도 둘째를 갖고 싶어요”

 이렇게 회사 동료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하던 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두 딸 맘은 제 오랜 염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이 순간 마음껏 기뻐하지 못할까요?      


  의심1. 케케묵은 남아선호사상의 귀환

  때는 바야흐로 2006년. 친척들이 옹기종이 모여서 명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빠는 제가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며 침 튀겨가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용히 한 쪽에서 사과를 깎으시던 할머니가 말씀하십니다.

  ‘딸아이가 팔자 드세 지구러, 대학은 쓸데 없구만!’

  저에겐 처음 느꼈던 환멸. 그런 시어머니를 둔 엄마는 동생은 꼭 남자아이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임신가간 내내 피 말라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나에게 남아선호사상이 녹아들었던 걸까요. 남과 여 성별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고 ‘선호’가 자리 잡은 세상에 지독스럽게 무의식 속 늘러 붙은 망령처럼요.     


 의심2. 아직은 힘든 여성으로서의 사회생활

 제가 광화문 커리어 우먼으로 활약하던 시절. 회식 2차엔 빠져주었으면 하는 동료들의 눈빛을 눈치 챈 순간이 있었습니다. 남자동기들에게 먼저 승진자리를 내어주고, 진달래 꽃 마냥 평정점수를 깔아주고 사뿐히 즈려 밟히는 기분을 느꼈던 순간도 있구요. 담배타임(담타)에 끼지 못해서 중요한 정보를 놓치던 때는 말할 것도 없군요. 종종 마주치던 이 ‘여성’으로 느끼는 유리천정의 팍팍함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요.      


 NO NO, 둘 다 아닙니다. 저는 저의 여성성을 사랑하고, 꽤나 성공적으로 꾸려왔다고 자평합니다. 또 첫째 딸내미와 우리 부부가 빚어내는 케미도 ‘환상적’이구요. 무엇보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여자 셋이 과일을 앞에 두고 드라마를 안주삼아 한바탕 수다를 떨며 마무리 하는 삶은 제 오랜 로망이었습니다. 아마도 성별힌트를 받고 느끼는 이 헛헛함은, 그저 가지 못한 길을 아쉬워하며 길 끝까지 한없이 바라보는 마음일 겁니다.





 성별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배속 아이와 함께할 미래는 온전히 상상의 영역.

 아이를 품은 지난 14주 동안 성별을 궁금해 하며 많은 시간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미래 둘째와 함께 하는 가족의 모습을 ‘딸버전’, ‘아들버전’ 골고루 상상의 물꼬를 터 머릿속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 두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확인사살을 받고 난 이후 한쪽 버전은 이제 짐을 싸야 할 망상이 되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아들버전의 상상은 이제 영양분이 가지 않아 회색빛으로 흩어지겠지요.

 그러니, 여기서 남자아이 버전의 상상을 한번 꺼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 콜라뚜껑을 딸 때 악력이 부족하면 아들내미 불러서 따달라고 할거야.

- 첫째 딸의 늦어 불안해지면 아들내미 불러 마중 좀 나가라고 하겠지.

- 온천 가족여행을 가면 남, 여 온천탕에서 각자 성별끼리 짝을 지어 이성에겐 차마 못하는 농밀한 이야기를 한 다음 한층 가까워진 기분을 느끼게 될 거야.

- 아이가 어린 땐 나도 한번 로봇과 메카닉의 세계에 한번 빠져보지 뭐

아들내미는 어느 날 문득 엄마를 지켜줄거란 듬직한 말을 내뱉어 코끝을 찡하게 할지도 몰라.      


  이제 여기까지.

  완벽히 헤어질 결심이 섰습니다. 추억의 문방구 앞. 형형색색 ‘반지뽑기’에서 ‘땅’ 반지가 랜덤으로 나왔을 때도 저는 즐겁게 ‘땅’의 역할에 따져들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저는 미련 없이 그토록 염원하던 두 딸 맘이 되어 슬기로운 육아생활을 이어갈 것입니다. 시인 프로스트의 시 <가지않은 길>의 주인공처럼 안타까워하며, 오랫동안 한 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는 건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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