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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 Jun 16. 2020

다행이다. 그 저녁 그 식탁에 빈달루가 있어서...

영화 <미안해요, 리키> 속 한 장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음식이 등장하면 나는 멈칫한다. 주인공이 홀로, 혹은 누군가와 함께 무언가를 먹는 장면이 나올 때면. 그 장면들은 내용 전체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별로 연관이 없을 때도 있다. 대단한 음식일 때도 있지만 그냥 우리가 늘 먹는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일 때도, 볼품없이 허름하고 초라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 장면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솔직하고 쓸쓸하고 끈질긴 생명력 같은 것,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보드랍고 포근한 무엇이 그 안에 숨어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들 : 아빠

아빠 : 응

아들 : 이거 진짜 맛있는데 이름이 뭐야?

아빠 : 코르마

아들 : 그래?

아빠 : 초심자용이지.

아들 : 정말?

아빠 : 그래, 이게 제대로야. 빈달루.

아들 : 그래?

아빠 : 응. 남자와 소년을 가르는 기준이지.

         아무나 못 먹어.

(자신 있다는 듯 한 입 먹는 아빠)

         와, 진짜 맵다.

(모두의 웃음)

아들 : 남자와 소년이 갈렸네.

엄마 : 얼른 물 마셔. 괜찮아?



희미하고 어둡지만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포장해 온 커리를 먹으며 아주 오랜만에 가족이 웃었다.


이 짧고도 흐뭇한 가족의 한 때가 점처럼 찍혀있는 영화, <미안해요, 리키>. 삶이 고단한 아빠(리키)가 겨우겨우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서 영화가 끝이 났을 때, 나는 애써 이 장면을 떠올렸다.


각자의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겨우겨우 다 같이 모인 저녁. '소년과 남자를 가르는' 빈달루(인도 커리 중 가장 매운 커리다. 코르마는 요구르트와 크림을 넣은 부드러운 커리)를 먹고 켁켁 기침을 하던 리키와 그 모습을 보며 행복하게 웃던 가족들이 있던 그 장면을. 다투고 난 뒤라 서먹한 아빠와 아들이 무슨 말로 화해해야 할지 모를 그 저녁의 식탁. 거기에 빈달루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어색한 화해의 과정도 필요 없었다. 허세를 부리며 호기롭게 빈달루를 입안 가득 넣었던 아빠를 보며 실컷 웃는 것, 그걸로 충분했다.


희망이라는 단어도 절망이라는 단어도 함부로 붙일 수 없는 리키 가족의 답답한 현실을 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였다. 그들에게 그런 저녁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도하는 것...




가족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는 리키가 택배 기사 일을 시작한다. 고용주는 그 일이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사업이라고 포장했지만 일이 시작되자마자 진실은 드러난다. 보이지 않는 통제 속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배달하기 위해 리키는 뛰고 또 뛴다. 엘리베이터는 자주 고장이고, 주차요원은 주차 딱지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점심 먹을 시간은 없고, 배달 경로를 지시하는 기계는 2분만 자리를 비워도 삑삑 거린다. 좋은 고객도 가끔 있지만 안 그래도 사는 일이 쉽지 않은 리키를 더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고,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페트병에 소변을 본다. 일을 하느라 정학 위기에 있는 아들의 학교 면담에 늦고, 딸아이는 불안으로 불면증에 야뇨증을 겪기도 하고, 복지사인 마음 착한 아내는 아이들을 전화로밖에 챙길 시간이 없다. 어느 날 리키는 괴한들에게 택배 물건을 뺏기고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몸과 마음이 엉망이 되어서도 리키는 벌금과 벌점이 두려워 출근을 한다.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치료도 못 받은 채. 그때 리키는 처음으로 꺽꺽 운다.


영화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휘몰아친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 자본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사람을 무너뜨려가는지 똑바로 보라는 듯. 숨죽이고 영화를 보던 나는 딱 한 번 겨우 안도의 숨을 몰아 쉬었다. 영화의 중간쯤 딸 라이자와 함께 한, 마치 놀이 같았던 배달 일이 끝난 뒤 아빠는 딸에게 제안한다. 아주 오랜만에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엄마 저녁 근무가 없는 날이니 인도 음식을 포장해 가자고, 오빠한테 집에 있으라고 말해 달라고. 그렇게 가족이 모였다. 식탁에서의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한창 웃음이 무르익을 무렵 엄마에게 메시지가 도착한다. 그녀가 돌보는 노인 한 명이 간병인이 안 와 화장실도 못 가고 있다는 소식에 엄마는 가봐야 한다며 일어선다. 그런 엄마를 보며 아들이 리키에게 제안한다. 토요일이라 택시 잡기도 힘드니 다 같이 아빠 밴을 타고 가면 어떠냐고, 조금 좁겠지만 한 명은 무릎에 앉으면 된다고. 아빠 밴으로 가면 빨리 도착할 수 있고 가면서 노래도 부를 수 있다고. 그렇게 밴을 타고 리키의 가족은 정말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노인의 집을 향해 달려간다. 식사 신(scene)에서 달리는 밴 신(scene)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은 사랑스럽고 따뜻하다. 그들은 원래 그런 가족이었다. 세상이 그런 가족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뿐.




얼마 전 길을 가다가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했다. 차 두 대가 지나갈 만한 좁은 길이었는데 약간 왼쪽으로 경사가 져 있었고, 막 배달을 나간 택배 트럭이 서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까만색 벤츠 승용차가 좁은 길을 지나가려고 속도를 늦추며 트럭 쪽으로 들어섰다. 유난히 번쩍여서 눈길이 한 번 더 갔는데 기분이 이상하게 아슬아슬했다. 뭔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택배 트럭의 한쪽 문이 열렸다. 트럭 옆을 천천히 통과하는 벤츠 쪽으로 저 혼자 열린 것이다. 배달을 나간 기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벤츠에서 내린 사람은 이미 잔뜩 인상을 구긴 채 기사를 기다렸다. 상황을 지켜보고 싶었지만 약속 시간이 임박했던 나는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택배 기사가 돌아왔을 때 벤츠 주인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외제차 수리 비용은 엄청나다고 들었는데 보험 처리는 순조롭게 되었을까. <미안해요, 리키>를 보며 자꾸 그날의 택배 트럭이 떠올랐다. 부디 조용하고 합리적이고 배려심 있는 합의가 이루어졌기를 바라지만 나는 알고 있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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