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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어야만 하는 이유

요즘은 딸이 대세라면서요.

by 쎄오

전 편에서 밝혔듯 우린 아들을 원했다. 이미 한 명의 고추쟁이 첫째가 있지만 둘째 역시 기왕이면 아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딸이 대세이고 엄마는 딸이 있어야 좋다는 말들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남편과 나는 각자의 이유로 아들이 우리에게 좀 더 어울리지(?) 않겠냐는 결론을 내렸었다.


우리 부부 모두가 동의한 그 이유라는 것들은,

하나, 아무래도 남매보다는 동성 끼리 더 잘 놀고 어울리지 않겠나 하는 마음에서였고

둘, 여자가 남자보다 범죄에 더 취약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키워내기 쉽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이 컸고

셋, 남편과 나의 성향이 여자 아이를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보다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심리적인 이유가 몇 가지 더 존재했다.




20년도 더 된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그날의 일은 내 머릿속에서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고 궂은날이면 간지럽게 느껴지는 흉살과도 같은 아픈 기억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일찌감치 아버지의 부재가 있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현실적, 정서적 결핍이 굉장히 컸다. 그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수히 많지만 여전히 내가 꼭 아들을 낳고 싶다는 마음을 간직하게 한 하나의 또렷한 기억이 있다.


그날은 어쩐 일인지 아버지가 집에 왔었고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겠다며 근처에 살고 계시던 삼촌이 우리 집에 방문을 했었다. 두 형제의 대화는 매끄럽게 흐르지 않았고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결국 몸싸움에까지 이르렀는데.

상황을 지켜보던 엄마와 언니 나는 공포에 떨었고 우리 세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그만 싸우라고 말로 말리는 일뿐이었다. 당시 실제 엄마와 언니가 어떻게 행동했었는지 사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명확한 장면은 남자 둘이 거칠게 몸싸움을 하고 있는 현장의 바로 옆방에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쭈그리고 앉아있던 내 모습이다. 아무리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우당탕 물건이 넘어지는 소리와 두 남자 사이에 오고 가는 짐승과도 같은 거친 소음은 막을 수 없었고 그 공포의 순간에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아들을 낳아야겠다. 내 편이 되어주는 나를 지켜줄 수 있는 힘이 있는 남자아이를 낳아야겠다. 그럼 나를 지켜주겠지...'




중 2 여자아이가 떠올릴만한 단순하고 유치한 생각 같지만 마흔 살이나 된 다 큰 성인 여자인 내가 변함없이 갖고 있는 진리 중 하나가 그 사건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한테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 약한 존재이다.'


그 이후의 삶 속에서 겪은 개인적인 경험들로 그 진리에 대한 확신은 좀 더 견고해졌고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를 비롯해 나에 대한 사실을 몇 가지 공유했다.


전 남편과의 생활 속에서 그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방 문을 걸어 잠그고 밤새 공포에 떨었던 이야기.

대학 시절 당했던 스토킹사건.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겪은 여러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 나는 성인 남자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이 기본적으로 깔려있고 여전히 그들이 큰 소리를 내거나 조금이라도 공포스러운 상황을 조성하면 무섭고 얼어붙는다고 말이다.




엄마의 트라우마와 아빠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나의 첫 째 아들은 벌써부터 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고 근육이 많으니 여자를 지켜줘야 하고 아빠처럼 해병대를 갈 것이며 나중에 커서 군인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땐 단백질이 근육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며 단백질의 중요성을 셀프 리마인딩하며 열심히 먹고 틈틈이 아빠와 함께 달리기를 포함한 그 나잇대에 맞는 운동을 하고 있다.


자칫 왜곡된 신념을 가질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만 가지 않는다면 남자가 여자에 맞서 힘으로 이기려 하지 않고 강자에는 강하게 그리고 약자를 지켜줄 수 있는 정의로운 사내로 클 수 있도록 우리가 길을 안내해 주면 되리라 믿는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 부부 사이에 새롭게 급부상한 최근 대화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이 험한 세상에서 딸아이를 안전하게 키워낼 것인가이다.

사건사고를 다루는 시사 다큐 프로그램 광인 나는 걱정스러운 내용의 이야기를 접하면 남편과 공유를 하곤 하는데, 얼마 전 그알에서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여자의 이야기를 보고 남편에게 물었다.


"기본적으로 운동을 꾸준히 시키고 호신술 같은 걸 어렸을 적부터 가르치면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음... 그래도 일대일 대치 상황에선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더군다나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알고 보니 사이코패스고 그런 놈이랑 엮이면 답이 없지."

"그럼 어떡하지ㅠㅠ"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는 주제이긴 하나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보며 상황에 따른 적절한 대처방법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보는 좀 놀아봐서 그 사춘기 여학생들의 아슬아슬한 선에 대한 동물적 감각이 있지 않아..?'

'... ...'

'그래 니가 지금 그 아슬아슬한 선을 넘으려하고있다. 그만 닥치는게 좋을 거다 남편'



아빠와 사촌형따라 운동하겠다는 아직은 너무나 작고 여린 나의 첫사랑이자 영원한 나의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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