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olleehan Jul 10. 2018

최저 임금 받는 주제에 된장녀

7530원, 평양냉면

우리 엄마 가요. 나한테 최저임금 받는 주제에 된장녀 짓이나 한다고 하던데요.  

저는 이번 달 월급 타서 신발 한 켤레 사는 것이 이토록 저를 힘들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위대한 노력과 의지로 끝끝내 실천한 내 생애 가장 현명하고 합리적인 소비였단 말입니다. 엄마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랬습니다. 내 피 땀 어린 노력 끝에 쟁취한 소비를 쓸모없는 허영을 채우는 한심한 일로 한방에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리는 아주 기가 막힌 한마디였습니다. 우리 엄마는 이런 말을 곧 잘 하지만 이번만큼은 평소보다 조금 더 충격적인 편이었습니다. 나는 허리뼈를 곧추세우고 의기양양해하다가 그 한마디로 단숨에 풀이 죽어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모처럼 사춘기 덜 끝낸 모자란 어른처럼 혼자 방 안에 들어와서 원망 섞인 볼멘소리를 한 것입니다. 


씨발 최저시급이 만약 이만원 정도가 되었으면은 ‘최저 시급'이라는 말이 '주제에’라는 수식은 어울리지 않겠지 하며 말입니다. '주제에'라는 말은 보통 어떤 처지를 비하하거나 비관할 때에 쓰이는 수식인데 그 정도 시급이면 아마 저는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 같아서 이만 원 정도로 정한 것입니다.

최저 임금을 받는 다고 해서 삶의 질도 최저로 누려야 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러는 저는 가장 싼 임금을 받는 노동자이니까 가장 싼 옷만 입고 가장 싼 음식만 먹고 가장 싼 커피만 마셔야 한다는 것인가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이런 관점에서 보면 커피도 기호식품이니 사치일 겁니다.) 물론 그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비싼 것이 귀하고 좋은 것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더 많은 값을 주면 더 좋은 것들을 더 오래 누리는 데에 이유가 있는 값진 경험들이 있고, 또 그런 사실을 알고 나면 값을 더 지불하고도 풍족하게 누리고 싶은 것들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는 것입니다.


 아마 장담하건대 이 신발 한 켤레 사는 것을 나는 한 마흔 번은 고민했을 겁니다. 최저 시급이 이만 원쯤 된다면 이게 과연 내 분수에 어울리는 신발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나라 최저시급은 이만 원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 새도 없이 그냥 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비싼 옷을 걸친 싸구려 인간이 되는 건가 생각을 했습니다만

우리 엄마는 왜 최저임금이 이만 원이 아닌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고 왜 내가 최저 임금밖에 못 받는 내 '주제'를 탓해야 했을까요 잠시 동안 원망을 거듭했습니다. 비싼 인간은 또 뭐고 싸구려 인간은 또 뭔지. 비싼 인간이 싸구려 옷을 걸치면 검소하다고 추앙받고 싸구려 인간이 비싼 옷을 걸치면 분수를 모른다며 뭇매를 맞습니다.


싸구려 임금을 받는 주제에 비싼 옷을 걸쳤다고 해서 내가 공주옷을 뒤집어쓴 거지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그래 봤자 거지 옷을 뒤집어쓴 공주가 되거나겠지요. (그런데 보통 공주가 거지 옷을 입으면 그 옷은 곧 공주옷이 되더군요) 그럼 거지는 뭐고 공주는 또 뭡니까? 한 시간을 일해서 7530원을 받으면 거지고 7540원을 받으면 공주라고 누가 그럽디까? 

내가 이 신발을 신는다고 무슨 고오급 인간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내가 이 신발을 신는다고 무슨 고오급 인간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니면 그토록 사람들이 된장녀니 김치녀니 뭐니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을 보아하니 정말 내가 이 고오급 신발을 신으면 고오급 인간이 되는 게 사실은 진짜가 아닐까요? 이 모든 게 마음속 깊은 곳에 뿌리 깊은 열등의식 때문일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내가 이 번지르르한 고오급진 옷을 걸친다고 고오급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내가 싸구려 임금을 받는다고 해서 싸구려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닐 텐데 우리 엄마조차도 나를 '최저 시급 받는 주제'라고 표현하는 까닭은 대체 그럼 무어란 말입니까? 7530원이면 오늘 점심으로 부장님이 사주신 을지면옥 평양냉면 한 그릇 먹을 수도 없는 깨나 푼돈이란 말입니다.(절대 오늘 얻어먹은 평양냉면이 태어나서 먹어본 냉면 중에 제일 맛있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표현하기를 '최저 시급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이 대체 무얼까 생각을 해봤습니다만 제가 열 살 때부터 대학에 들어간 지금까지도 분명 누가 그랬는데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거라고요. 그래서 최저 시급이 적다고 불평불만할게 아니라 그저 최저 시급보다 돈을 더 받는 사람이 되면 그걸로 되는 거라고 그랬습니다. 어른들은 항상 토를 다는 걸 싫어했습니다. 열 살 먹은 어린 저는 그래서 최저 시급 받는 삶을 살면 속된 말로 좆되는 줄 알았지 뭡니까. 그럼 오늘 나는 인생이 좆된 사람이 내린 커피를 들고 출근을 했고 인생이 좆된 사람들 틈에서 그럼 나도 인생이 좆된 건가?라는 좆같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더 심각하게는 이게 그래도 많이 오르고 올라 7530 원인 겁니다. 3년 전에 내가 처음으로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을 때 최저시급은 5210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하고 있을 적이면 궁둥짝을 소파에 붙이고 있는다고 한심하게나 보던데요. 젊은 청춘이 가만히 있지 말고 돈을 벌기는 벌어라 그런데 최저임금이 적은 거에는 토달 필요 없다 이겁니다. 그 이유는 청춘은 청춘이라서 똥물을 뒤집어써도 아름답기 때문이랍니다. 

아직도 최저임금조차 못 받는 사람들 그러니까 좆보다 더 좆이 된 사람도 허다하게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럼 그 사람들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지 어디 한번 생각이라도 해봅시다. "아직도 그런 곳이 있단 말이야?"라고 묻거나 "그럼 그런 곳에서 일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하신다면 저야할 말은 없습니다만 단언컨대 적어도 김치녀 된장녀 이런 하찮은 말을 만드는 것보다야 아주 의미가 있을 겁니다. 


나라는 인간의 가치가 내가 가진 물건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모두들 암 그렇고 말고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한데 왜 나는 멋지고 좋은 것을 안다는 것조차 되려 나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그럼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옛 말이 진짜인가요? 내가 천 원 정도를 더 내면 훌륭한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나는 천 원을 아껴 부자가 될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단 말입니다. 내가 사고 싶은 신발 한 짝을 포기하면 나는 그러면 스크루지 영감처럼 부우-자 되어서 평생 혼자 남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나? 나는 티브이 시에프 속에 나오는 부우-자 되세요 에서의 그 부우-자가 될 수 있나? 아무리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말입니다. 이 세상은 너무 복잡하게 기형이라 저 같은 중생은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기를 포기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가리워진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