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 눈앞의 현실이 허공에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세상을 지나가며 맺어온 관계들을 시간의 한가운데에 고스란히 붙들어 두려는 간절함이 기록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먼 옛날부터 이 마음을 담아 동굴의 벽에 그림을 새기고, 점토판 위에 문자를 남기고, 바람에 흔들리는 파피루스에 그들의 이야기를 적었다. 그 속에는 자신이 본 세상과 믿음을 넘어서, 자신이 살아온 시절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남아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에는 단지 사냥 장면이 아닌, 그들이 살았던 세계와 두려움과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설형 문자는 신을 향한 기도, 통치자의 통치, 그리고 그들의 사회적 질서가 마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약속처럼 점토판 위에 새겨졌다. 또한, 파피루스에 기록된 이집트의 신화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영혼의 길을 안내하며, 왕조의 영광과 신앙을 남기고자 했다. 중국의 갑골 문자 역시 단순한 기록을 넘어 제사와 점복의 예식을 새김으로써 그들의 역사와 신앙이 시간이 지나도 기억되길 바랐다. 로마의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은 제국의 영광을 높이고,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일상과 백성들의 삶을 빠짐없이 적어 후세에 남기고자 했다.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라고 말하는 ‘성경’ 역시 하나의 기록물이다.
이처럼 인류는 시간의 흐름에 맞서 자신들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기록은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기억이 되고, 순간의 인식이 역사로 남아 후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다리가 된다. 기록은 사라질 뻔한 순간의 이야기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가 되고, 이 세계가 다음 시대에도 이어지길 바라는 기도와도 같다.
동경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글 역시 인간의 기록에 대한 본능의 한 부분이다. 많은 사람이 작가를 꿈꾸고, 혹은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버킷리스트 한쪽에 ‘죽기 전에 책 한 권 쓰기’를 넣어 놓는다.
글은 ‘나’를 표현하고 담아내는 그릇이며, 눈앞의 현실을 넘어 다른 사람과, 다른 시대와 소통하는 다리다. 말을 할 수 없는 과거의 자신이, 말없이도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미래의 누군가에게 남기는 편지와 같다. 글을 쓰는 행위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의 생각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담고 있다.
글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글로써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고통을 견디며, 행복을 기록한다. 무형의 감정이 언어로 형상화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진심을 발견한다. 글은 때로 혼자만의 기록이지만, 글을 통해 우리가 하는 고백과 사색은 우리를 다시 다른 이들과 연결한다. 이렇게 글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이다. 개인이 자신만의 언어로 쓴 글은 읽는 이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닿아, 새로운 해석과 공감을 낳는다.
또한, 글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도구다. 일상 속에서 스쳐 가는 수많은 순간순간이 글로 남아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 속 많은 이야기와 철학이 기록된 글을 통해 이어져 왔듯, 글은 한 시대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 둔다. 이 글들은 시대를 넘어 읽는 이들에게 지혜와 통찰을 전하며, 그 시대의 정신과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해 준다. 결국, 글이란 인간의 진심과 경험이 오래도록 남아 세상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을 가장 순수하게 보여주는 창이며, 시간을 담아 보존하는 그릇이다.
대필
시간이 흘러서 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시간에도 인간의 기록에 대한 본능과 글에 대한 동경은 ‘책’이라는 것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본능과 동경만으로 기록하거나 글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필은 바로 이 본능과 동경을 채워주는 하나의 방법이자 문화이다.
대필은 단순히 누군가를 대신해 글을 써주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가 살아온 시간을 말로 풀어내어 세상 속에 남기는 과정이다. 대필작가는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글에 담아, 그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정성스레 다듬는다. 누군가가 세상에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그들의 시선으로 보며, 손끝으로 기록해 나가는 일이다.
대필의 역사는 길다.
중세 수도원의 필경사들이 신앙과 지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책을 필사하고, 조선의 사관들이 왕조의 역사를 매일 기록했던 것들이 모두 대필의 범주라 생각한다.
결국, 기록과 대필은 이름만 다를 뿐, 서로 다르지 않다. 기록이 한 시대의 사람과 사건을 담아 후대에 전하는 일이라면, 대필 역시 한 사람의 진심과 경험, 지식을 글로 담아내는 기록의 연장선에 있다. 과거에 그림과 문자, 종이와 잉크가 그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대필을 통해 한 사람의 이야기가 긴 시간에 걸쳐 다듬어지고 다듬어져, 한 권의 책이 되고, 한 편의 글로 남는다. 기록과 대필은 시대와 세대를 잇는 인간의 본능이자, 그 간절함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