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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Apr 14. 2021

멈추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기

<윤희에게>

방 문을 나섰다. 따뜻한 패딩을 입었다. 컨버스를 신기가 무서웠다. 벌써 눈바닥에 발 잘못디뎌 넘어지는 내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조금만 있으면 끝나. 근로장학생이 몇일만 지나면 마무리된다. 다음학기가 막학기라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다. 우두두둑. 우두두둑. 눈 밟는 소리가 에어팟 프로의 노이스캔슬링을 뚫고 귓속 안에 들어왔다. 아니지. 이런 날에 눈 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에어팟을 케이스에 넣고 가방에 담았다. 두두두둑. 두두두둑. 덩크를 신어서인지 땅이 미끄럽진 않았다. 윙하는 바람소리가 귀 주변에서 웅웅거렸다. 에어팟을 끼고 싶진 않았다. 아무 이유 없다. 그냥 이번엔 이런 소리들을 들어보고 싶었다. 필름카메라를 꺼내 사진도 한번 찍었다. 이런 눈 오는날이 날이면 날마다 오는게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기계와 멀리 떨어진 일상을 살 필요도 있단 말이야.


 시린 바람에 귀가 잘릴 것 같았다. 이번에 입은 후드엔 모자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모자를 쓰고 버스를 기다렸다. 언제쯤 온담. 이 생각 하자마자 버스가 왔다. 버스 안엔 사람이 없었다. 눈이 점점 더 많이 오고 있었다. 아침 7시. 직장인들 출근할 시간인데도 사람이 없다니 낯설었다. 인화동을 지나 제주시청에 도착했다. 제주시청에 정차한 버스는 학교로 가고 있었다. 버스 엔진 소리를 오랜만에 들은 것 같았다. 예전엔 버스 좌석에서 많이 잤는데 말이야.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질 않았다. 이번엔 강박때문이 아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버스에 앉아있었더니 예전 생각이 났다. 생각이 많은걸 부정하고 싶던 때가 있었지. 그래서 이어폰을 늘상 끼고 다녔다. 혼자다니는게 지루해서 싫었다. 이제는 혼자 걷는게 별 생각 없어졌다. 어쩐지 귀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버스를 내려서 저벅저벅 길을 걸었다. 신발에 눈 녹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그땐 그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다. 그땐 몰랐던게 지금에서 보인단 말이지. 눈 덕에 잊고 살았던 게 생각이 났다. 다시 한번 웃음이 나왔다.



<윤희에게>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된 것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일상에 지친 주인공과 함께 시작한다. 주인공 윤희는 남편이랑은 이혼했고 딸 하나와 같이 산다. 어느날 윤희에게 첫사랑의 편지가 온다. 새봄이는 이 편지를 기점으로 엄마와 여행을 가자고 말하고, 고민하던 윤희는 여행길에 나선다. 윤희는 남에게 희생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를 위해 기차를 탄다. 일본에 도착하고 나서 윤희는 첫사랑과의 추억이 담겨있는 곳을 하나 둘 찾아간다. 쥰의 집 앞에 가서 첫사랑이 지나가는 모습에 눈물참기도 하고, 딸과 서로 담배피는 사실을 공유하기도 한다. 윤희는 스스로에게 점점 더 다가가기 시작한다. 새봄이는 이와 함께 엄마와 점점 더 친해지기 시작한다.


새봄이는 궁금한게 많지만 무례하게 다가가진 않는다. 새봄이가 엄마에게 다가갔던 방법은 세가지가 있다. 맨 처음으로 담배를 피우는 사실을 터놓는것이다. 모녀는 서로 모르는 줄 알았던 것에 공감대가 통한다. 두번째로는 윤희와 새봄이 온천에서 '아빠 만나기 전에 연애 해본적 있어?'라고 묻는 것이다. 새봄이는 첫사랑이 여성이라는걸 알면서도 잘 넘어간다. 세번째는 새봄이의 카메라에 대한 대화를 한다. 윤희의 남동생만 대학을 보냈고 정작 본인은 학교에 못 갔다는 말해준다. 영화는 이렇게 주인공의 행보를 따라가며 쥰과 새봄, 윤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얼핏 보면 쥰의 이야기가 윤희의 이야기였다. 또 새봄이는 윤희의 10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각자가 처한 상황이 사실 비슷하다. 가령 새봄이가 남자친구와 있는 모습을 윤희에게 걸리기도 하고 새봄이와 쥰이 만나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엇갈리게 보여주며 지나온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딸의 미래가 엄마의 현재로 보이는 듯한, 그런 오버랩을 통해서 말이다. 영화는 엔딩부분 쥰에게 보내는 편지로 마무리짓는다. 윤희는 부칠지도 모르는 편지를 읽어준다. 윤희가 나레이션으로 말한다. 그만큼 충만하던 시절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희는 과거에 머무르는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미워하면서 말이다.


영화는 이렇게 과거에 붙박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 한마디를 건낸다. 자기 스스로의 삶을 못 살것 같은때가 있던 이들이 있을거다. 이들에게 일본 여행을 초대했다. 특히 구체적으로 스스로를 미워했던 이들이라고 특정짓는다. 윤희같이 말이다. 윤희는 오빠가 추천해준 남자와 함께 결혼했다. 대학도 못갔다. 사랑과도 이어지지 못했다. 모두 다 자기의 선택으로 이뤄졌지만 자기 자신보단 세상 비위의 맞추느라 그런 선택지를 골랐다. 이는 감독의 분명한 의도로 보여진다. 영화 초입부의 피로에 찌들어있는 상활을 보여준다. 후에 주인공이 다 때려치우고 스스로를 위해 여행을 떠날 때 윤희가 그제서야 웃는다. 남 눈치보느라 내 이야기 못했던 과거와 나레이션으로 마무리짓는 현재가 대비되는것도 다른 예시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의 차이는 인물이 어떤 처지에 처해있는지에 따라 달려있다. 지금의 나로 한발자국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또 용기낼수록 인물은 행복해져갔다. 분명하지 않은 것 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선명한 공감대를 준다.


난 감독 임대형이 우리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고 생각한다. 윤희가 잘못한 건 애초에 없었다. 그냥 윤희는 윤희 나름대로 살았을 뿐이다. 감독은 이걸 말하고 싶었을거다. 당신이 잘못한건 없다고 말이다. 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 마지막 부분에 있다. 윤희는 엔딩부분에 나레이션으로 누군가에게 말한다.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거야. 이 나레이션은 윤희의 꿈이 될만한 장소와 함께 보여진다. 용기라는 단어와 윤희의 자아가 성장하는 과정이 같이 주어진거다. 이 부분이 나는 영화의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었던 때가 있던 사람이 있을것이다. 쓸쓸한 후회나 한같은게 서려있을거다. 따돌림의 트라우마로, 누가 한 나쁜짓으로, 남 눈치보느라. 뭐 그렇게 삶을 살다보면 반복되서 돌아가게 되는 사건이 있을거다. 윤희는 결혼식 첫날에도 쥰을 생각할정도로 깊게 박혀있었다. 주인공은 그런 자기 자신을 마주했다. 그러고 한발자국 앞으로 더 나아갔다. 대단하게 근황을 터놓고 이야기한게 아니라, 클라이맥스의 잠깐 한 순간을 위해서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보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윤희는 자기 스스로가 아니었던 시간을 발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임대형 감독은 우리의 삶에 있어 스스로를 발견하는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몇년이 지나고 나서 찾은 스스로의 모습에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걸 말해주는 것 같다. 잊어버릴 수 없는 과거가 있다면 잘못한게 없다며 스스로를 확신하는 것도 중요했다.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해할 수 있게 되는건 타인이었다. 그래. 잘못한건 없어.우리에게 필요한 건 스스로를 알아가고, 또 이해하는것이 우선인지도 모른다. 난 이 영화가 이런 따스함이 있어서 좋다고 느꼈다. 나 스스로가 아니었던 하루하루에서 벗어나는 법? 어렵지 않다. 용기를 내자.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이 바뀔 자기 스스로를 위해. 잘못한건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주인공 김소혜-김희애의 연기도 좋았지만 유재명의 연기도 굉장했다고 느꼈다. <기생충>과 <벌새>에 비해 인지도가 비교적 작지만 나는 이 작품이 이 둘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감독이 차기작을 얼른 냈으면 좋겠다. 내 필름카메라 자주 들고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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