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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Mar 29. 2021

아름답게 써서 하얗게 불태우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경력있는 신입. 세상에서 손 꼽히게 우스운 말 중 하나다. 베테랑인데 나이가 젊어. 그런 경우가 있기야 있겠지만 사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온갖 대외활동에 여러 단체에서 일 해봤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실수가 잦다. 어느 순간은 익숙해서 잘하지만 또 언제는 못하는게 사람이었다. 이건 나에게만 적용되는 전제가 아니다. 완벽한 인간에게 기댄다는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어려서 그랬지. 그런 사람을 찾았다는 거 말야.


25살의 나에겐 이 교훈이 무덤덤하다. 사람은 a거나 b로 나뉘어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더 멋지고 부족한 인간이란 건 상대적인 것이다. 나는 이런 걸 잊어버린 채로 좁은 시야를 가지고 사람들을 많이 비웃어봤다. 저 사람은 저래서 안돼. 저 인간은 저래서 별로야. 구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난 대법관이라도 된 거 마냥 사람들을 판단해댔다. 누군가가 나를 평가하는 건 싫으면서 말이다. 먼 길을 돌아보고 나서야 트라우마가 만든 열등감 때문에 이런 시간을 보냈다는 걸 알게됐다. 아. 이건 내 모습이 아니야. 씁쓸한 후회가 남긴 했지만 이 것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프지는 않았다. 그 누군가가 나에게 조소한다 한들 내 스스로에게 하는 것만 할까. 이제는 남 시선이 두렵지 않은가보다. 스스로가 만든 길을 걸을 줄도 알게 됐으니. 돌아보면 이것들 덕에 좀 더 너그러워 질 수 있게 됐다.



이런 삶의 어느 순간을 지나가면 참 머릿속이 씁쓸해진다. 인생은 배워야 할 것 천지다. 특히 표현이라고 하는건 많이 어렵다. 사랑이라면 더 그럴테지. 난 첫사랑을 기억하기도 싫다. 내가 뭘 해서 누군가에게 상처줘서가 아니다. 흔히 말해서 이불을 뻥뻥 차고도 남을 이야기라서 그렇다.  난 누군가가 다가와야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 먼저 다가가는거 못한다. 이 두가지의 미숙한 요소가 섞여 생각만 나면 웃긴 에피소드 몇개를 남기고 추억 하나를 떠나보냈다. 난 나에게 솔직한다는게 뭔지도 몰랐다. 내 마음이 어떤건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건 굉장히 부담스러워서 일단 내가 나부터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나에 관해서만 그랬을까? 상대에게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지지합니다'라고 말하곤 했지만 난 그러기엔 그릇이 작았다. 계란을 세개 먹을 수있다면 세개 모조리 먹는 사람이었다. 다음에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내 사정이 변해서, 또 생각이 바껴서 흥미가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당연한 것에 익숙해져서 왜?를 빼먹은 사람이었다. 내 세상에는 나만 있었다. 심지어 나를 믿지도 못했다.


난 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회한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고 느꼈던 것 첫번째는 씁쓸함이었다. 10대때의 나는 분명 가슴 아픈 시간이 있었다. 이게 뭘까. 단순히 첫사랑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수능 시험에서 실패할때도, 글 못쓴다는 말 뒤에서 들을때도 신경 많이 쓰였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 온 시간을 다 쏟는다는건 이렇게 감내해야 할 것들이 많은 일이었다. 20대 중반이 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살던 하루하루 덕에 나를 버텨왔다는걸 알게 됐다. 매 번 이렇게 생각이 많으면 다치기 쉽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이름만 바뀐 '나'를 위해 살고 있었다. 난 이런 사람이었다. 무엇을 위해 살았나. 어떤 목표를 위해 살았지. 목표가 넘어지면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막상 갖게 되면 별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난 감독이 삶의 이 부분을 영화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첫사랑의 아픔과 성장에 대해 씁쓸한 격려를 보내면서 말이다. 감독이 첫사랑을 안해본 사람은 아닐거다. 당연히 그도 서툴렀을거다. 심지어 원작 소설을 각색한 제임스 아이보리는 1928년 출생이고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왜 하필이면 첫사랑으로 돌아갔을까. 엘리오는 스스로에게 물어가며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주인공의 정체성은 주인공이 알아서 탐구한 셈이다. 어차피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 어차피 변하는게 사람이다. 언제든 생각이 변할 수 있다. 무엇이든 엘리오가 스스로를 알아가며 지난 사랑에 아파하는건 오롯이 그의 것이다. 감독이 영화를 아름답게 쓴 이유도 마찬가지일거다. 모자라고 서투를수는 있어도 그 순간 하나하나만큼은 아름다웠다. 뭐 그런 이야기를 감독이 보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뒤를 돌아보는 순간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또, 이것들을 위해 얼마만큼 희생해왔는지도 알 수 있다. 아름답지. 후회도 많고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도 이것들을 부정하라면 부정할 수 없을거다. 왜? 이게 나니까. 내가 우는 표정으로 웃으며 떠나보낸 내 모습이니까. 오롯이 나에 집중한 시간이야 말로 당신이 보낸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에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이런걸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상대의 이름으로, 또 어떤 목표로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시간일테니까 영화의 제목이 된거고. 난 어느 한 구석에서 <해피 투게더>가 생각났다. 삶이란 이렇게 역설적이다. 괴로운 시간이야 말로 아름다웠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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