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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Apr 05. 2021

남들과 달라 소외된 모든 사람들에게

<문라이트>


집에 가는 길이었다. 나는 거북목이 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자세가 비틀어져 있다고 했다. 복숭아뼈와 맞지도 않은 바지 총장이 신경쓰였다. 난 아래를 내려다 보는것이 습관이었다. 용돈을 한푼 두푼 모아 샀던 스탠스미스 기름이 반질반질했다. 아. 오늘은 애들이랑 피시방 갔었지. 구토가 심하게 올라와서 나 먼저 집에 오는 길이었다. 학교 근처에 벛꽃이 폈다. 난 내가 나온 초등학교 근처 중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친구들이라면 아주 좋아했던 내가 먼 동네에 와서 이러고 있다는게 슬프기도 했다. 애들이랑은 사이가 멀어져 보기가 힘들다. 아니 사실 나는 휴대전화도 없어서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오다가다 만나면 잘지내니 인사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애들이랑 멀어져갔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거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것 같다. 난 버스를 타서 미술학원으로 갔다. 엠피쓰리 이어폰이 있어 심심하진 않았다.


난 오늘도 그렇게 집에 왔다. 이어폰이 에어팟이 됐고, 무거운 책이 가득하던 책가방에는 신입생부터 고대하던 맥북이 있다. 누군가에게 연락이 와도 답장을 안할때가 많고, 사실 먼저 하기에도 할 말이 없다. 주위에 누군가가 있으면 있는거겠지. 난 관계맺기에 서툰 사람이 맞는것 같다. 한동안은 부당한 따돌림에 나를 숨기고 싶어서 나를 속여왔지만 이제는 그냥 그런대로 흘러두는게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엉뚱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나밖에 모르는 소통방식에 그렇게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사가 있다. 솔직히 세상과는 어울린 적 없어. 누군가의 대단한 인생 멘토라도 되거나 좋은 친구와 동생인 양 하지만 나는 어쩌면 루저에 가까운 인간일지도 모른다.



<문라이트>는 흑인, 동성애자, 학교폭력 및 가정폭력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3부작 영화다. <라라랜드>와 함께 이 해에 열렸던 시상식이란 시상식은 모두 휩쓸었다. 이에 대한 이유가 소수자와 약자를 중심으로 한 영화라서는 아닐거다. 작품이 갖는 장점이야 아주 많다. 흑인 피부 질감에 대한 표현, 멘토 후안과 그의 여자친구 및 주인공 어머니에 대한 연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명대사까지. 이 영화가 주요 시상식에 이름이 오르락 내리락했던 이유는 분명하고, 그 중 내가 생각하는 건 확실하다. 이야기의 전달 방식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이 전달방식은 소수자인 주인공의 처지가 왜 사람들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1부에서 후안과 어머니가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어머니는 후안에게 '당신이 내 아들 키울꺼야?'라고 묻는다. 후안은 째려본다. 어머니는 '너는 그래서 나에게 약 계속 팔거야?'라고 반문한다. 샤이론의 삶이 어떤지 이 장면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따돌림으로 마음을 닫았던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멘토를 만나지만 그가 우리 어머니에게 마약을 팔던 마약상이었다. 설득력이 있는 우연이다. 샤이론의 외로움을 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왜? 이런 상황은 주인공에게만 있거든. 샤이론의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기댈 곳이 없어진 셈이다. 감독은 이렇게 일대기를 주르륵 나열하는것이 아닌, 성장하는 과정의 단면만을 보여주어 주인공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주인공이 첫사랑에게 받은 상처와도 연결된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던 주인공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방황하다 앞과 비슷한 방식으로 상처를 입는다. 영화는 이렇게 사건을 서술하며 주인공이 겪을 외로움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한다. 보다보면 분명해진다. 주인공은 남들과 달라서 자주 넘어진 사람이었다.


감독은 이렇게 삶에서 상처를 받은 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됐을지를 우리에게 추측하게 할 뿐이다. 이런 연출의 의도는 분명하다. 영화가 일대기를 연속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고 했다. 삶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들로 데려가 함께 관찰한다. 이 후의 모습은 관객이 직간접적으로 만들어온 인생관에 비추어 추측할 뿐이다. 이 외의 경우가 딱 한게 있다. 엔딩 직전에 두 주인공이 만나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남들처럼 살다가 삶을 놓쳤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두 주인공이 선택한 답은 서로의 진심을 터놓는 것이다. 각자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면서 말이다. 사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영화는 주인공의 대사 한마디로 그들의 미래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답을 보여준다. 난 이게 감독이 주는 메세지라고 생각한다. 리틀과 같이 남들과 달라 마음의 문을 닫았던 이들을 밤바다 아래로 초대해 파란 빛으로 위로하는 셈이다. 이것은 엔딩신에 있는 사람이 '리틀'이라는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리틀은 주인공이 상처받기 전의 내면세계다. 감독은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남들과 달랐기에 아팠던 이들을 하나로 공감해주고 있다. 난 이래서 이 영화를 좋아한다. 난 게이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다. 대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서툴렀고, 미안해도 미안하다고 똑바로 못했다. 누군가에겐 상처줬던 내 자신을 혼내면서도 이해해주는 영화가 이 <문라이트>라고 생각했다.


4월 20일까지 이 작품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난 이 영화를 다들 한번 쯤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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