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 스포일러 없는 리뷰
이 영화의 주인공은 취준생 용준(홍경)이다. 철학과 졸업생인 용준. 하고 싶은 것이 없으니 해야 할 일도 없다. 그냥 앉아있는 용준. 이력서 쓰고 떨어지는 일상의 반복이다. 이런 용준이를 가만히 지켜놓을 리가 없는 사람이 있다. 용준의 부모는 돈가스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배달 알바를 시키는 용준의 부모. 딱 3개월만 하기로 한다. 첫 번째 배 달지는 어떤 수영장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남자 애가 시선에 들어온다. 말을 거는 용준. 하지만 이 애는 뭔가 특별했다. 목소리 대신 수화로 대화하던 아이. 아이는 용준의 배달 지를 가리켰다. 목적지에 도착한 용준. 수영장에 들어간 순간 용준이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수영 코치로 보이는 여자에게 반한 용준. 여자의 이름은 여름(노윤서)이었다. 또 여름은 동생 가을(김민주)이의 매니저이기도 했다. 파릇파릇한 두 청춘이 만났다. 두 남녀는 서로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됐다. 두 사람의 여름이 시작됐다!
이 영화에서 빛났던 건 세 배우의 존재감이다.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홍경배우는 박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의 톤을 깔끔하게 이끌었다. 이 영화에서 용준이가 가진 임무는 막중했다. 청각장애인을 핵심으로 삼은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 안에서 소리가 억제된다. 용준이가 부모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긴 하나 대부분은 대사가 없다. 그럼 표정으로, 또 반응으로 사랑에 빠졌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홍경 배우는 그 섬세한 감정변화를 잘 포착해서 연기로 구현했다. 대표적으로 용준이가 용준 부모와 함께 있는 모든 장면을 보면 그 체감이 확 느껴진다. 이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은 여름이와 있는 장면 / 친구와 있는 장면 /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 세 가지로 나뉘어서 사랑의 힘을 받은 용준이를 묘사하는데 힘을 덧붙인다. 가족들이랑 있을 땐 비교적 편안함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여름이와 있을 때는 항상 조마조마하다. 또 동시에 여름이에겐 눈을 마주치는 둥 아닌 둥 하면서 여름이의 내면 그 자체에 귀 기울이는 남자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역량을 보여줬다. 이 배우가 <D.P>에서 조석봉을 괴롭히는 폭력적인 병사 역할이었고 <댓글부대>에서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이 배우가 평소에 영화를 많이 보는 시네필이라고 하는데, <펀치 트렁크 러브>에서 아담 샌들러가 맡았던 주인공 역할의 초반부를 어느 정도는 영향받고 연기한 티가 났다. 글쓴이는 이 배우가 평소에 이렇게 소년스럽지만(잘생겼다는 뜻) 듬직했구나 싶어 놀랐다.
다른 주인공 여름 역을 맡는 노윤서 배우는 그녀의 출연작 중 가장 카리스마가 빛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주로 10대 역할을 맡았던 노윤서 배우. <우리들의 블루스>나 <20세기 소녀> 같은 영화들은 본질적으로 정해져 있는 상황에 대한 리액션만 보여줘야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본작에서의 서여름은 다르다.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세 인물의 성장기(용준/여름/가을)를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는 덕에 이 인물은 주도적으로 극을 이끌 수밖에 없다. 이 과제를 잘 알고 있는 듯이 영화와 배우는 여름의 얼굴에 모든 시선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한다. 여름이의 얼굴과 손이 영화를 이끄는 핵심 감정선이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여름이가 누군가에게 연락을 받고 달려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노윤서 배우는 그전 장면과의 감정표현을 분명하게 드러냄으로써 플롯의 전복을 효과적으로 이끈다.
핵심인물 3인방 중 가장 연기 이력이 적은 가을 역의 김민주 배우는 원래 가수보다 이 쪽에 가까운 아티스트 같았다. 글쓴이에게 배우라고 함은 마이클 케인이 한 말이 생각난다. ‘배우는 눈을 파는 직업이다’라는 말이다. 글쓴이는 이 말이 다른 사람(그것도 가상의)에게 취해있어야 직업인으로서의 역량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해석했다. 이 문장을 이행하기에 김민주 배우는 장점 특색이 강하다. 고양이 같은 눈매와 뚜렷한 이목구비 덕에 이 인물의 감정전달이 관객에게 더 쉽게 느껴진다. 실제로 영화는 가을이의 눈빛을 담는 데에 주력했다. 영화 안에서 호수가 두 번 나오는데, 이 호수에서 볼 수 있었던 김민주 배우의 연기는 눈빛이 인상 깊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런 선천적(눈)인 연기 아니더라도 김민주 배우의 기술적인 부분도 크게 다가온 장면이 있다. 영화 안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큰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걸 둘러싼 두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김민주 배우는 적극적으로 캐릭터의 입장을 보여주는데 세 인물 중 영화의 동력을 만든다는 점에서 캐릭터를 잘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건 대화다. 중요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 영화가 가진 낭만적인 속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많은 로맨스 영화에서 반복한 테마가 있다. 바로 진심으로 전하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같은 영화를 보면 어떤 로맨스물은 시간을 돌리고 기억을 지워서라도 사랑을 믿는다. 이 영화는 기존의 장르물처럼 사랑을 전하는데 그게 수어다. 그렇다면 수어를 중요하게 생각해야겠지? 영화는 다방면의 수어를 보여준다. A와 B가 대화하는데 C를 거친다. 사실 A-B만 대화해도 굳이 상관없는 장면에 C를 거친 장면을 넣었다. 이 영화에서 수어를 통한 대화를 강조하겠다는 의지를 전적으로 보여준 단면이다. 수어를 강조하기 위한 다른 장치도 있다. 바로 문자다. 현 2024년 MZ들이 문자메시지를 못 쓴다면 그건 어불성설이다. 수어에서 생동감 넘치는 표정으로 인물들의 내면을 보여준 것과는 반대로 직접적으로 텍스트를 통해 보여준다. 이 문자를 그냥 휴대전화 모니터를 그대로 보여주는 연출을 썼나? 아니다. 텍스트를 굳이 화면 안으로 보여줌으로써 인물들이 공간을 뛰어넘어 소통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사실상 수어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과 동격으로 놓이는 것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영상통화를 통해서 수어로 대화한다. 문자로, 영상통화로, 수어로 각기 다르게 대화하면서 어떻게든 마음을 전하는 청춘남녀의 모습을 변화를 조금씩 주면서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조한 연출 덕에 두 사람의 마음이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또 대화가 중요했던 이유는 다루고 있는 소재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다고 볼 수 있는 점은 청각장애에 대해 무작정 연민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동시에 소모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당연히 극 중 일부 인물들에게 중요한 건 수어다. 그렇다면 수어에게 의미를 강화하는 연출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수어라고 대화가 아니냐?’라는 질문을 던지기에도 충분하다. 윗문단에도 썼듯 이 영화의 수많은 대화들에게 수어가 모자랄 것이 없기 때문. 오히려 수어 때문에 두 사람의 소통이 이뤄진다는 점에서 수어의 중요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이 연출을 뒷받침하듯 용준이의 입에서 여러 대사가 나오는데, 감독이 처음부터 이 측면을 고려하고 각본을 썼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 대화를 통해 사랑을 표현한다는 방식은 1차원적으로 사용되는 걸 넘어 점층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인물관계는 크게 두 가족으로 나뉜다. 용준 가족과 여름 가족이다. 용준 가족은 여름 가족과 다르다. 서로 소통하는 데 있어 수어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말과 말로 대화가 이뤄진다. 이 장면이 이뤄지는 방식이 특별하다. 어떻게 보면 그냥 일반적인 가족드라마 같기도 하지만 여러 장면을 겹치면서 이 시퀀스가 들어가야 할 당위성을 만들었다. 이 당위성은 반대측면에서 영화 안의 메시지에 해당하는 장면을 강조하는 효과까지 보여준다. 이 영화의 장르 중 하나가 청춘드라마이기 때문에 이런 연출이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여주냐에 따라 작품의 개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익숙하다면 익숙하지만 나름 탄탄하게 이 장면을 보여줘 묵직하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한다.
이 영화의 단점이 크게 있지는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굳이 뽑자면 캐릭터성이다. 용준이와 여름이의 캐릭터는 훌륭하다. 그냥 달달하기만 한 로맨스의 주인공이 아니다. 사랑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체화하면서 생동감 있는 인물이 탄생했다. 문제라고 느낀 건 가을이와 용준이의 친구 재진이다. 가을이는 사실상 주연으로서 이 영화의 굴곡을 담당하는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인물은 그거만 담당한다. 당연히 가을이도 그동안 살아온 인생의 궤적이라는 것이 있을 텐데 단지 수영만 좋아하는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김민주 배우가 이 인물을 체화한 것과는 정반대로 각본에서 이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이 인물이 말하는 대사들이 약간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 인물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들이 사실상 본인이 원인인 것도 어느 정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친구 재진은 플롯을 위해 기능적으로 사용된 감이 있다. 이 인물의 행보가 유쾌해서 그렇지 어떤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헌신적인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오토바이와 관련된 장면에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부분이 영화에서 생략된 것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 영화에 대한 총평은 ‘사랑스러운 영화’라는 점이다. 청각장애라는 소재에도 불구하고 연민에 빠지지도 않았고, 이야기의 달달함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본문에 적지 않았지만 나름 흥미진진하고 트렌디하게 연출한 흔적도 보인다. 소리가 없는데 어떻게 화면에 집중시키지?라는 질문을 짧고 빠른 템포의 음악으로 리듬감을 살리기도 했다. 이런 장점에 힘입어 오랜만에 좋은 로맨스/코미디물이 등장했다. 야심 가득한 배우 홍경의 섬세한 감정연기가, 배수지 배우를 연상케하는 사랑스러움의 노윤서 배우가 본인의 매력을 오롯이 뽐내는 영화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