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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야매 Jan 30. 2019

돼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중심주의 속에서 갈려나간 돼지의 넋을 기리며

고기가 맛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뜨겁게 달궈진 불판 위에 불그스름한 살코기와 하얀 비계가 적당히 섞인 삼겹살을 올릴 때 군침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치익하고 고소한 소리가 코끝을 간질이고 흘러내린 돼지기름에 마늘과 김치가 익어가면 식탁에 둘러 앉은 사람들의 마음도 덩달아 설렌다. 젓가락은 허공을 답보하듯 빠르게 불판 위로 날아가 고기를 한 점 낚아채 그 주인의 입으로 운반하고 그 위로 다시 소주잔들이 부딪히면 그 앞에 앉아있는 우리는 더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의 유령이 불판 위를 배회하고 있다. 당신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잔인하게 살해된 돼지의 영혼이. 


이들의 넋은 아무리 소주잔을 연탄불 위로 세 번 돌려봐야 달래지지 않는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에서 잔인하게 희생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더 싸게, 더 많이 먹기 위해 인간은 공장 속으로 수많은 생명들을 밀어 넣었다. 그들은 기계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착취당한다. 그들이 착취 당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그들이 착취 당하는 것은 살코기이며 살가죽이며 살 권리이며, 그들의 삶이다.


솔직히 삼겹살 맛있는 건 어쩔 수 없지..  출처: pixabay

인간이 행하고 있는 모든 육식은 옳지 않으며 모조리 그만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다. 인간이 육식을 그만두어야 할 필요와 이유를 대는 것보단 차라리 육식을 해야 할 필요와 이유를 대는 것이 더욱 그럴듯하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듯 인간도 돼지를 잡아 먹을 수 있다. 사자는 양을 잡아먹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양을 잡아먹는다. 그것이 사자가 사자답게 사는 방식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돼지를 잡아먹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돼지를 잡아먹는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식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돼지가 돼지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자가 초원에서 양답게 살고 있던 양을 잡아먹는 것과 다르게 인간은 돼지가 돼지답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돼지를 가두고 살찌우고 죽이고 자르고 진공 포장한다. 돼지는 한 때 돼지였던 것이 되어 정육점으로 떠나기 전까지 우리 밖으로 나설 수 없다. 직접 물어볼 수 없어 돼지답게 사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감히 상상이나 해볼 뿐이지만, 최소한 양돈장 우리에 갇혀 6개월 남짓 살다 고기가 되는 것이 아님만은 분명하다. 자연수명 15년의 돼지는 6개월, 인간으로 치면 걸음마에 익숙해지지도 않았을 시기에 도축 당하고, 자연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상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양돈장의 돼지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돼지다운 삶을 박탈당했다는 근거다.


우리는 동물들이 동물답게 살 권리를 박탈하면서 생명을 과소비하고 있다. 필요 이상의 생명을 도축하고 필요 이상의 효율을 추구하기 위해 그들의 삶과 복지를 빼앗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만큼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고 인간답게 살 수 있다. 물론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76억 인간의 수만큼 각기 다른 정답들이 있겠지만, 한 가지 감히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다른 삶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절대 인간다운 삶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이다. 


고기를 조금 비싸게, 조금 적게 먹어도 충분히 인간은 삶과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다. 우리의 생산력은 충분히 그 단계에 도달했다. 육류 소비를 줄인다고 우리는 굶주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단지 조금 더 싸게, 조금 더 자주 고기를 먹기 위해, 그리고 조금 더 행복하기 위해 인간은 그들 삶의 권리를 박탈한다. 마치 우리에게 그들의 권리를 박탈할 권리라도 있는 듯이 말이다.


출처: pixabay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똑똑해서 그 다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문명을 이룩했다. 자연에서 무리 지어 숨어 살던 인간은 뇌와 손을 무기로 숲에서 나와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다. 아마 인간 앞에 위대한 이라는 수식을 붙여도 무방할 테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을 콘크리트로 뒤엎는데 성공했다고 해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인간만을 위해 존재한다 생각해선 곤란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다른 생명들을 마음껏 사용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적이 없다.


우리는 지나친 인간중심주의에 빠져있다. 다른 생명체의 권리를 박탈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지만, 단지 그럴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것이 생존에서 벗어난 부차적인 욕구를 더욱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 다른 삶들을 뺏는다. 인간은 지구의 다른 모든 생명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인양 행동한다. 동물들은 그들 삶의 권리도 채우지 못한 채 죽어가지만, 인간은 개의치 않고 마치 기계를 돌리듯 그들을 끊임없이 소모한다.


동물들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 역시 하나의 삶을 가진 생명체로서 대우 받아야 한다. 인간의 편의가 동물의 삶보다 우선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얻은 편의로 인간이 좀더 행복할지라도 그것은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없다. 다른 생명들과 나란히 살아가는 지구의 동등한 구성원 중 하나로서 인간은 우리 이웃들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 비록 삼겹살 가격이 조금 오르더라도 돼지가 돼지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공장에 가두어버린 동물들의 삶을 다시 돌려주고 불판 위를 배회하는 그들의 영혼을 달래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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