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는 것
나는 영화 취향이라는 것이 딱히 없는 사람이다. 내가 영화 리뷰를 가끔 올리는 인스타그램 계정 소개글을 보면, '내게 말을 거는 영화들을 좋아합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로맨스, 코미디, 멜로, 드라마, 스릴러, 액션 등 가리는 장르는 거의 없고 나에게 어떤 생각할 거리나, 여운, 느낌을 주는 영화면 전부 다 좋게 생각한다. 나같은 사람은 많을 것 같지만 생각 외로 가리는 영화가 없는 사람은 드물다. 내 주변만 하더라도 장르를 가리는 사람도 많고 상업 영화만 보거나, 아니면 다양성 영화만 보던가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내 친구들 중에서는 애니메이션은 절대 안 보는 친구도 있고, 액션을 안 보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영화에 관해서라면 굉장히 관대하다. 포스터나 예고편 같은 선재들이 끌리는 영화는 그냥 보는 편이고,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들도 챙겨보는 편이다. 상업 영화도 좋아하고 다양성 영화(를 사실 더 좋아하기는 한다)도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업으로 삼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 싶어하니까, 나도 당연히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마 나는 이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영화 마케팅을 하면서 내가 재밌게 본 영화, 내 취향에 맞는 영화, 혹은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희박한 일이다. 내가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약 70편이 조금 못 되는 작품들을 만났지만 내 맘에 드는 작품은 10편이 될까 말까. 정말 별로 없었다. 내 맘에 쏙 드는 영화보다는 내 맘에 정말 안 드는 작품을 만날 확률이 훨씬 높다. 하지만 모든 마케터들의 숙명이 그렇듯이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영화를 어떻게 해서든지 관객들이 보고 싶어하도록 있는 힘 전부를 쥐어짜서 포장해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마음도 없는 말, 뻥을 쳐야 한다는 것이다.
형체가 정해져 있는 물건의 마케팅도 어렵겠지만 나는 영화 마케팅이 정말 어려운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예를 들어 '무선 칫솔 살균기'를 판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만족하는 부분은 명확하게도 기계의 성능일 것이다. 혹은 디자인이 예쁘다던지. 배터리가 오래 가고, 사용이 편리하며, 살균도 잘 되고, 생활에 편리함을 준다. 이런 장점들이 명확하고 이런 기능적 요소들만 문제가 없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만족하며 물건을 사용한다. 하지만 영화는 아니다. 영화는 개인의 취향적인 부분이 너무나도 크게 작용되는 컨텐츠고, 배우나 감독이 누구인지도 중요하고, 스토리, 음악, 미쟝셴, 주제 등등 고려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스포일러가 있는 영화일 경우에는 어떤 스토리는 밝히면 안되고, 마케팅 상 도움이 되지 않을 설정이지만 그 설정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영화는 그 나름대로 어렵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겠지만요)
마케터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내가 담당하는 것에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영화 마케터를 하고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당장 관뒀을지도)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담당하기 싫은 영화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감독도, 배우의 인지도가 전무하고 스토리도 별로고 주제도 별로인 그런 영화들이. 쉽게 말해 관객들에게 '팔아야할 지점'이 전혀 안 보이는 영화들을 만날 때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 영화는 대체 어떻게 해야하나..."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니 영화가 개봉하는 날까지 일하기도 싫어지고 스트레스는 늘어간다. 재미없는 걸 재미있다고 해야 한다니! 영화에 대해서는 거짓말 치고 싶지 않지만 거짓말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게 영화 마케터로써 가장 힘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취향과 신념에 정 반대되는 영화를 만나도, 군말 없이 팔아야 한다는 것. 정말 먹기 싫어하는 음식을 억지로 누군가에게 떠먹여야 한다는 벌이라도 받은 심정이다.
어찌됐든 영화를 '일'로써 만나야 하니, 이전보다는 영화를 열심히 보지 않게 됐다. 이미 회사에서도 야근까지 하며 영화에 관련된 무언가를 끊임 없이 접하게 되면서 예전에 틈만 나면 보았던 예술 영화들은 더욱 안 보게 되었다. 깊게 생각을 하기보단 막힘 없이 떠먹여주는 킬링타임용 상업 영화를 이전보다 더욱 많이 보게 되었다. (핑계일수도 있지만...) 종종 눈에 띄는 다양성 영화들은 많았지만, 영화관에 발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최근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를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보통 '잘 먹고 잘 산다'는 기준에서 한참 벗어나 생활하는 주인공 '펀'. 그녀의 일생이 항상 아름답고 평탄하지는 않지만 펀은 자신의 일상에 만족하며,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간다. 그녀에게 'House'는 없지만 위안을 주는 'Home'은 언제나 함께였다. 그녀의 인생이 유독 별난 것처럼 보여지기는 해도 사실 인생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떠돌지 않는가. 이 영화를 보고 최근 굉장히 위안을 얻었다.
어제 열심히 개봉을 준비하던 영화가 갑작스럽게 개봉 연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경우는 굉장히 많았지만 유독 힘이 빠지고 기분이 좋지 않다. 내가 해오던 모든 일들이 영화가 개봉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쓸 데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 영화가 좋아해서 시작한 일인데 이제 영화 때문에 인생이 힘들게 느껴지다니, 아이러니하다. 코로나 19 팬데믹 속에서 1년 넘게 이 일을 지속해오면서 회의감도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영화를 사랑하고 좋아하니까, 스스로를 위로했던 거 같은데 이번에는 느낌이 좀 다르다. 그냥 앞으로 상황이 쉽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나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겠지, 하면서도 이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유독 많이 드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