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중 320일 정도만 죽을 거 같긴 하다
내가 맨날 안 좋은 얘기만 해서 영화 마케팅이란 직종이 굉장히 지옥이고 어렵고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해악의 직업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 같다. (아니란 건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 일을 해오면서 항상 힘들었던 순간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쁘고 행복하고, 보람찼던 순간들도 많지는 않지만 종종 있었다. 모든 직장인들이 이런 순간은 한번쯤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느낀 좋은 점을 한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근데 지금 느낀 건데 막상 다 쓰고보면 그렇게 좋은 점처럼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
1. 배우 혹은 셀럽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일반 사무직에 비해서는 많다.
흔히 영화 일을 하면 맨날 배우들을 마주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철저히 내가 몸 담은 직종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아예 없지는 않지만 많다고 말할 수준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영화의 경우 배우들을 만날 기회가 최소 한 번씩은 있으며, 운이 좋으면(?) 여러 번일 때도 있다.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행사를 최소한으로 진행하다보니 더욱 볼 일은 줄어들었지만, 최근에도 업무를 진행하며 배우들을 두세 번 정도 만났던 거 같다.
하지만 일은 어찌됐든 일인지라, 처음 배우들을 봤을 때보다는 다소 영혼 없는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어쩌다가 볼 때면 정말 기분이 좋고, 운이 좋으면 싸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곳은 일터이고 내 사적인 감정을 마구 뿜뿜하기에는 많은 스텝들과 매니저들과 광고주들이 보고 있기에 이를 깍 깨물고 참아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배우에게 가서 사진이나 싸인을 부탁하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얀 힘든 일이다.
2. 개봉 예정인 영화를 미리 볼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이 장점은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크게 장점으로 느끼지는 못할 거 같지만, 내 기준 그나마 이 일을 하면서 느낀 장점이기에 넣어본다. 물론 내가 맡은 작품에 한해서지만, 보통 마케팅을 진행하게 되면 해당 영화를 미리 보는 경우가 많다. (텐트폴 대작이거나 직배사 작품들은 그러지 않은 경우가 더욱 많지만, 보통은 내부 마케팅 스탭들을 위한 시사가 개봉 전에 최소 한 번은 진행된다.)
만약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의 영화라면, 개봉 전 대한민국에서 이 작품을 누구보다 먼저 볼 수 있다니! 라는 생각에 심장이 뛰기도 한다. 종종 괜찮은 영화를 보게 된다면 일찍부터 추천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기도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메리트로 꼽고 싶은 점 중 하나다.
3. 영화의 크레딧에 이름이 실린다.
이건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한데, 한국영화의 마케팅을 진행할 경우 영화가 끝나고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에 선명히 박힌 내 이름 석자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해외 영화의 경우에는 크레딧에 실릴 수 없지만, 그래도 한국 영화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사실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 중 하나다.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한국 영화의 경우 끝까지 엔딩크레딧을 보려 한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이 영화를 개봉시켰구나.. 라는 동지애와 더불어 한 작품을 위해 고생한 많은 스태프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싶어서이다.
최근에 한 편의 영화를 개봉시켰는데, 여러 명의 주연 중 A라는 배우가 있다. 나는 그 배우의 작품을 우연히 대학교 시절 영화제에서 보고, 그때부터 팬이었고 거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전부 챙겨봤다. 그런 A와 '나란히'까지는 아니지만 같은 엔딩 크레딧에 실리는 기분은, 정말이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었다.
더불어 영화 마케팅을 하다보면 필수적으로 영화진흥위원회에 영화인 코드가 생성되고, 네이버 영화 DB에 내 정보와 함께 나의 필모그래피가 등록된다. 처음 검색창에 내 이름을 쳐보고 필모그래피를 봤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영화인'이라는 그 세 글자가 지금까지 나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막상 장점을 정리해보니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것 같고... 크게 메리트 있어보이진 않네... 하지만 뭐 상관 없다.
단점들도 무수히 많은 직업이지만, 저 장점들로 인해서 나는 지금까지 일을 해올 수 있었고, 힘든 순간 속에서도 나름의 보람을 찾으며 회사 생활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회사에서 무엇을 얻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직장인들에게 묻는다면, 답변 중 99%는 "돈"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나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돈만 주는 회사'를 다니기 위해서였다면 애초에 이 업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일이 재미 있어야 하고,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여야 하며, 보람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 나에게 '영화 마케팅'이라는 업무는 아직도 나에게 있어 회사를 다닐 수 있게 해주는 이유인 것이다.
정말 이직을 하고 싶고, 이 업계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매일매일 하고 있지만 정말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내 스스로가 안주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 일이 내 천직으로 느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신할 수 있다면 내게 '영화인'이란 이름은 인생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중요한 아이덴티티고, 값진 결과라는 것이다.
영화가 아직도 재미있는 걸 보면, 이 일에 덜 질렸다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