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흥미롭게 읽었다. 수행하는 자의 일대기를 다뤘다는 점에서 반가웠고, 궁금증이 일었다. 짧은 이야기 안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 부모, 연인, 자녀, 스승, 벗, 노동, 자연, 사물과의 관계가 풍성하게 담겨있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고 정립해 가는 시선을 밀도 있게 풀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싯다르타는 바라문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청년이 될 때까지 전통을 지키며 수행하는 삶을 산다. 그러다가 속세의 이방인이자 적으로 보이는 사문의 무리에 고독한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 또한 사문의 길을 걷기로 뜻을 정한다. 싯다르타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비워진 마음으로 평온을 찾는 것. 하지만 수행이 계속될수록 자신은 다시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 자아로부터 그저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이 싯다르타를 괴롭게 한다.
오래된 친구 고빈다는 깨달음을 얻은 자인 고타마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를 따르기로 한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가르침이란 누구도 줄 수 없으며 오직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밖에 없다 여기고 고빈다를 떠난다. 싯다르타는 생각하는 것, 기다리는 것, 금식하는 것을 배워왔고, 그렇게 삶을 산다. 자신의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믿고 따랐다.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다 느꼈을 때 가장 황홀한 기쁨을 느낀다.
진실로 이 세상에서 바로 나 자신,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신비, 내가 하나이고,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이 신비, 내가 싯다르타라는 이 신비만큼 내 생각을 사로잡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세상에서 나에 관해, 싯다르타에 관해 가장 아는 것이 없는 사람도 나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배우고 싶고, 나 자신의 학생이 되고 싶고, 나에 대해 알고 싶다. 싯다르타의 비밀을 알고 싶다.
싯다르타의 새로운 걸음에 한 여인이 나타나는데, 바로 카말라다. 싯다르타는 그녀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싶어 했고 빠르게 습득해 갔다. 싯다르타의 목적은 카말라와 함께 하는 것이었으며 그녀의 몸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속세 사람들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 바로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비밀이며, 자신에게서는 그것이 없다고 느낀다.
기녀 카말라는 몸을 굽혀 그의 얼굴과 나른해져 가는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가 본 사람들 중 최고의 연인이에요.” 그녀는 신중하게 말했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강하고, 유연하고, 의지도 굳죠. 당신은 나의 기술을 아주 잘 배웠어요, 싯다르타. 언젠가 내가 더 나이가 들면,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어요. 하지만 내 사랑, 당신의 진정한 내면은 여전히 사문으로 존재하면서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무도 사랑하지 않죠, 그렇지 않나요?”
“그럴지도 모르죠.” 싯다르타가 노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과 같아요. 당신 또한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랑을 기술로써 행할 수 있나요? 아마도, 우리 같은 종류의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 없는 거 같아요. 하지만 어린아이 같은 속세의 사람들은 사랑을 할 수 있죠. 그것이 바로 그들의 비밀입니다.”
싯다르타는 그 비밀을 손에 넣었다. 세상의 욕망, 탐욕과 나태함, 나아가 그가 경멸하던 욕심에 사로잡혔다. 싯다르타는 지겨움, 비참함, 죽음으로 가득 찼다. 부끄러운 혐오감이 그를 덮칠 때마다 도박함으로 부를 경멸하는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려 했다. 자신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고, 그저 쉽게 죽고 싶어 강으로 갔다. 그러던 도중에 싯다르타는 자신의 고향인 바라문을 의식하게 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난다. 마음이 맑아지며, 자신이 그동안 나쁘다고 여겼던 것들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그것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에 싯다르타는 강의 목소리를 듣는 삶을 살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싯다르타의 미소는 뱃사공 바수데마의 미소와 점점 더 닮아갔다. 그 미소는 거의 똑같이 밝아지고, 축복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잔주름에서 빛나는 그 미소는 어린아이의 미소 같기도, 또 노인의 미소 같기도 했다. (…) 그들에게 강물은 그냥 강물이 아니라 생명의 목소리, 존재하는 것의 목소리, 영원이 형성되는 것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를 만나러 여행하는 카말라와 그의 아들이 만나게 된다. 카말라는 도중에 독에 중독되고, 싯다르타는 주름진 그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그는 한참 동안 앉아서 평화롭게 죽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그는 그녀의 입, 늙고 지친 입, 그 입술을 관찰했다. 얇아진 입술, 그리고 그는 기억했다. 그의 젊음이 한창이던 시절, 갓 갈라진 무화과와 같던 그 입술을 떠올리며 지금 이 입술과 비교했다. 오랫동안 앉아서 그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 피곤한 주름을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그는 그 자신의 모습 또한 보았다. 창백하고 꺼져 버린 자신의 얼굴.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와 그녀의 젊은 얼굴, 붉은 입술, 불타오르는 눈이 동시에 현존하는 것을, 이 영원의 느낌을 그의 온 존재가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이 이 순간, 모든 생명의 불멸성을, 모든 순간의 영원성을 느꼈다.
싯다르타에게는 다시 한번의 고비가 찾아오는데,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자신의 우리 안에 가두고 싶어 했으며, 아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혐오하고 결국 도망친다. 싯다르타는 강물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때로는 무시했으며 아들을 찾으러 가지만 결국 자신이 집착하며 아들의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 일련의 일을 겪으며 싯다르타는 더 이상 속세의 사람들과 자신을 가르지 않게 되었다. 모든 충동, 이 모든 유치한 것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지만 엄청나게 강하고 강렬히 살아가는 것들, 강하게 지배하는 충동과 욕망은 이제 싯다르타에게 더 이상 어린아이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는 고빈다를 다시 만남으로 끝을 맺는다. 고빈다는 이전에 세속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싯다르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났었다. 이후에 자신이 따르던 고타마가 죽고, 고빈다는 사공이 되어 있는 싯다르타를 만난다. 그리고 그와 대화하며, 그가 깨달은 이야기들이 이해되진 않지만 싯다르타의 미소 속에서 자신의 스승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완전한 자의 미소를 발견한다.
고빈다는 깊이 고개를 숙여 절했다. 그가 알지 못하는 눈물이 그의 늙은 얼굴 아래로 흘러내렸다. 가장 친밀한 사랑의 느낌, 가장 공손한 존경의 느낌이 불타올랐다. 그는 땅에 손을 짚고, 고개를 깊이 숙여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싯다르타 앞에서 절을 했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고빈다에게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모든 것, 그의 인생에서 그에게 소중하고 거룩했던 것들을 상기시키는 얼굴이었다.
싯다르타라는 인물을 통해 치열한 자기 탐색, 깊어지는 시선과 명확한 한계, 그것들이 결합되며 낳는 새로운 삶에 대한 이해를 볼 수 있음에 즐거웠다. 싯다르타는 스스로의 인생을 살았다. 자신에게 부여받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겪어냈다. 어리숙했던, 뜨거웠던, 불안했던, 초연했던 매 순간이 싯다르타 자신이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대상에 온전히 젖어들었고, 연이 다했을 때는 그 자리에 놓고 떠났다.
싯다르타의 삶을 어떻게 나의 삶에 연결 지어볼 수 있을까. 삶은 분명 다 할 수 없는 여러 국면이 있겠지만, 결국 나에게 주어진 ‘나’라고 하는 이 존재를 들여다보는 것, 그것을 기반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나 또한 원한다. 고빈다는 심지가 굳세지만, 기존의 체제 안에서 틀을 깨지 못하는 인물이다. 나도 그렇고, 어쩌면 많은 이들이 싯다르타의 삶을 원하지만 고빈다와 같이 사고하고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고빈다의 삶과 싯다르타의 삶에 또 하나의 비교군을 설정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싯다르타가 말했던 것처럼, 가르침에는 그 사람의 삶의 체험이 온전히 담기지 못한다. 가르침을 듣더라도 결국 살아내고 쟁취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고빈다는 한평생 갈망해 왔고 원했던 것을 싯다르타의 미소에서 찾는다. 그리고 고빈다의 삶 안에 박혀있던 삶의 조각들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짜였으리라.
나에게 있어서 어떠한 배움, 관념을 들이는 이유는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세상을, 나를, 그래서 우리를 이해해 가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앎이 비록 고통을 가져다준다고 하더라도 무지의 삶에서 단 한 자라도 벗어나는 것은 일종의 환희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비록 관념이 삶에서 끌어올려졌다 하더라도 그 관념은 다시 자신의 삶으로 내려와 검증받아야 할 운명을 타고 난다.
싯다르타는 고귀하다 여기던 수행에 젖어 있을 때 오히려 다른 생명과 자신을 거리 두며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드는 선택을 해왔다. 진흙탕 같다 여겨지던, 그래서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고 여겨지던 그곳에 푹 젖어본 후에야 싯다르타는 그동안 배워왔던 것들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내려 온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타적인 사랑은 없다.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을 할 뿐이다. 누군가를 돕는 행위(과연 누군가를 돕는다는 게 가능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 사랑한다 말하지만 그 사랑으로 대상을 묶는다. 자기 존재의 안경을 쓰고 존재를 바라보고, 아픔을 예쁘게 포장해서 선물로 준다. 오늘 깨달아도 내일 다시금 반복하며 끊임없는 자기혐오와 환멸에 빠져든다. 끝없는 앎과 동시에, 좁혀질 일 없는 삶의 현실. 그 괴리 속에서 고통받는다. 춥고 어두운 밤에 울다 지쳐 잠들었다가도,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빛 아래에서 삶의 기쁨을 노래한다. 뭉글뭉글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행복을 바란다.
이 지독하게 찬란한 삶이란 것을 끌어안기 위해 우리는 쉽게 사랑에 빠져 영원을 약속하고, 그 이와 똑 닮은 아이를 낳고, 내 것이라고도 여겼다가 쓰라리게 독립도 시켜보고… 뭐 그러나 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삶을 함께 책임져간다면, 그리고 내 삶의 조각을 나눈다면 어떨까? 어떻게 뜨겁고, 어떻게 깊어질 수 있을까? 그 이의 주름과 뒷모습을 보는 건 어떤 걸까? 생명을 내 안에 품고 낳아 기른다는 건 어떤 어려움과 환희가 있을까? 나는 그 아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사랑의 생생함을 가정 단위에서만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여전히 내겐 뿌연 안개와 같다. 그렇기에 언제든 맞이하고 싶은 더없이 설레고 두려운 삶의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