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 한 장면을 담으며
병맥주 두 병을 시킨 소희는 작은 테이블 앞에 맥없이 앉는다.
나이에 맞게 통통하던 볼은 수척해졌고 빛나던 눈동자에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겨울에 슬리퍼만 신은 맨발은 빨갛게 얼어 있다.
좁은 문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 한 줌을 그녀는 한참 동안 바라본다.
- 영화 《다음 소희》 속 한 장면을 담으며
우연히 이 영화를 보았다.
러닝타임은 138분이었지만 나는 꼬박 이틀 동안 소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뽀얗고 통통한 볼이 사랑스러운 소희는 콜센터 실습생이다. 그녀의 소속은 특성화고 애완동물관리과지만 정작 실습을 나간 곳은 통신사 콜센터이다.
취업률의 압박에 몰린 담임교사는 '대기업 계열사'로 콜센터를 포장하지만 사실은 열악한 하청업체 중 한 곳에 불과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교적 깔끔한 사무실에 적지 않은 인원이 근무하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횡포와 불법이 만연하다.
친구를 모욕하는 취객들에게 서슴없이 덤빌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던 소희는 콜센터에 온 지 며칠 만에 눈물을 보인다.
무슨 말을 해도 화만 내는 고객, 입에 담기도 무서운 욕설을 난사하는 고객, 성적인 암시가 담긴 대화를 강요하는 고객. 고객이라는 말을 빼면 분노조절장애, 폭군, 변태로 불릴 만한 자들과의 대화를 거듭하며 소희는 점점 바스러져 간다.
결국 실습생들에게 인간적인 배려를 보여주었던 이 팀장이 내부 고발이 담긴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그녀는 마지막 희망의 끈마저 놓고 만다.
정장 셋업 위로 백팩을 어색하게 둘러매던 열아홉 살 소희는 그렇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다.
영화 속에서는 우연한 인연을 가진 형사 유진이 소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자 동분서주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들은 아무 말없이 찬 땅에 묻힐 뿐이다.
어느 실습생의 죽음. 잇따른 현장 실습생 사망사고. 특성화고 실습은 안전한가.
실습생이라는 세 글자만 쳐도 수백 건이 넘게 떠오르는 연관 기사들 사이로 현실은 큰 파동 없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어.
유별나게 굴지 말고 참아.
네가 그러면 다른 사람들까지 피해 봐.
이런 조언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 일은 제 책임이 아니라서요.
고작 중간관리자인 제가 뭘 할 수 있나요.
이런 변명은 언제까지 반복될까.
괜찮아.
정말 열심히 했잖아.
그만하면 됐어.
일이 중요하지만 삶은 더 중요해.
어른이라고, 회사라고 언제나 옳은 건 아냐.
집에 가서 발부터 녹이자.
차갑게 언 발을 비벼주며, 나는 소희에게 이런 말을 건네고 싶었다.
《다음 소희》
이 영화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음 소희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바람을 글에 실어 보내며, 나는 이틀 동안 함께 했던 소희를 이제야 떠나보낸다.
《다음 소희》는 2017년 전주에서 발생한 故 홍수연 씨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죽음을 부른 실습, 열아홉 연쇄살인 미스터리>에도 나왔던 본 사건은 현장실습에 대한 전면 개편 논의를 시작하게 한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2018년 학습 중심 현장실습제도가 도입되었으며, 2023년에는 「직업교육훈련 촉진법」 개정을 통해 강제근로 금지와 직장 내 괴롭힘 금지 등 근로기준법상의 보호 규정이 현장실습생에게도 적용되게 명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습처에 대한 형식적인 관리 감독, 교육이 아닌 노동에 초점을 맞춘 실습 관행, 사고에 대한 불확실한 책임 소재, 취업률을 우선으로 특성화고를 평가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그렇듯 현장실습의 문제 역시 결국 특정 규정이나 특정 사람을 바꾼다고 해결될 일은 아닐 것입니다. 취업에 목을 매는 사회 분위기, 부족한 담당 인력과 과중한 업무, 애매한 역할 분담과 비현실적인 가이드. 이런 구조들이 함께 변해야 다음 소희가 등장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 갓 피어나는 꽃잎들처럼 여리고 순수한 청춘들을 보듬으며 함께 나아가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