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천을 찾아 오렌세로 떠난 이유

즉흥여행의 또 다른 기준, 추위

by 라영이


추위는 내 모든 계획을 바꿨다.

차가운 밤, 톨레도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더 따뜻한 도시로 떠나겠다고 결심했다. 수요일 아침, 마드리드의 낮은 기온이 나를 붙잡았다.
사실 오전 온도는 6도였다. 한국에는 역사적인 폭설이 내렸으니, 마드리드의 추위가 특별히 유난스러운 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온기를 원했다.

'다음 도시는 온천으로 할까?'

금요일 체크아웃 날이 다가왔지만, 다음 일정은 예약이 안 되어있었다. 수, 목 이틀간 돈을 지불하고 일정을 고정해 버리면 마음이 자유로울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 상태로 금요일 오전 눈을 뜨니, 오늘도 마드리드의 아침은 10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1. 움직이기 싫어. 마드리드에 좀 더 있자.
2. 온천 어디로 갈지 검색하자.
3. 롱패딩을 사야겠어!
라고 생각했다.

이른 아침부터 온천을 검색했다. 발렌시아 지역은 온천이 많지만, 11월 내린 홍수로 제외했다. 확인하진 않았지만, 야외 온천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짐작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사실 출국 전부터 발렌시아 지역은 여행 계획에서 배제되었다. 대홍수가 내려서 인명피해가 컸고, 사회적 혼란이 있다고 한국에서도 기사가 났기 때문이다. (물론 오픈채팅방의 소식에 따르면, 사실 큰 문제는 없었단다.)

솔직히 시위가 일어난 건 내 여행에 중요한 영향 요인은 아니었다. 파리 여행 때는 지하철이 파업을 했다. 자주 있는 일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냥 버스를 타고 여행을 했다. 또, 과거 시리아 내전 이후 유럽에 난민 이슈가 한창이던 시기, 이탈리아 나폴리를 여행 중이었다. 거리에 임시 터전을 설치해 둔 난민들이 있었지만 그 거리를 걱정 없이 돌아다녔었다. 홍콩의 민주화 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날에도, 옆 골목 호텔에서 묵고 있었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위험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한국에서 지인들에게 조심하라고 연락이 왔었고 걱정 끼치는 상황에 내가 있는 건가 생각해 봤었다.

그리고 현재 연세가 더 들어버린 부모님의 걱정이 너무 커, 나는 일찍이 스페인의 홍수피해지역을 제외했다.

발렌시아 지역을 제외하니, 갈리시아의 오렌세라는 도시가 나왔다. 지도상에서 해당 지역에 온천이 몰려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음 행선지를 오렌세 온천으로 정했다.

오렌세로 간다면 동선상 마드리드로 다시 돌아오게 되니, 마드리드는 다음 일정에서 더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오렌세로 떠나기로 했다.

리셉션에서 1박을 연장하고, 오렌세 왕복 티켓을 예매했다. 오렌세는 보통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 당일치기로 구경하거나 1박을 하며 온천으로 몸을 푸는 여행객이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따뜻한 온천을 여러 날 하고 싶어 4박 5일로 결정했다. 톨레도에서의 열린 선택이 마음 편했던 경험으로 편도를 끊을까도 했지만, 왠지 이번엔 아쉬워도 예정대로 마드리드로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어서 왕복을 끊었다.

그리고 오렌세 숙소 예약을 시작했다. 무조건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원했다. 2분 거리의 호텔이 있어서 예약을 진행했는데 결제 직전에 다른 사람이 예약했다는 알림이 떴다.

그다음으로 가까운 곳은 한 호스텔이었다. 과거 경험상 소도시에서는 호스텔 다인실도 사람이 적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역 근접이라는 최우선 순위를 흔들 필요 없이 호스텔을 예약했다.

추위는 모든 기준을 '몸이 편한가?'로 고정시켰다.

그렇게 예약을 끝낸 후, 한참 쉬다 패딩을 사러 나갔다. 현지에서 입을만한 겨울옷을 가져왔지만, 나는 포근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아주 두꺼운 영하에 입는 겨울옷을 가져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블랙프라이데이로 쇼핑골목은 사람이 정말 많았다. 예상치도 못한 아이스링크를 만나 캐럴을 들으며 한참 구경도 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은 마요르 광장과는 또 달랐고 회전목마의 어린이들은 사랑스러웠다.

코트, 숏패딩, 롱패딩을 하나씩 사고는 곧바로 롱패딩으로 갈아입고 가게를 나왔다. 따뜻함은 행복한 여행이 될 것 같은 마음을 더 키워줬고 기분은 몽글몽글해졌다.

몇 년 전, 기분 나빴던 어느 날, 예쁘게 내리는 눈을 보며 기분이 순식간에 좋아지는 나를 보며,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참 간사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예전엔 '일희일비하지 말자.'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되새겼었는지 셀 수도 없다.

따뜻한 옷을 사고 나오면서 느끼는 감정에 무척 좋으면서도, 예전에는 calm vibe를 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감정이란..'이라며 나 자신에게 한차례 시니컬했겠단 사실이 떠올랐다.

마음이 바로 시니컬해지지 않고 머리에 과거 시니컬해지던 습관이 떠오름으로써, 그 습관에서 한걸음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온전하게 평온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누렸다.

하루하루의 선택은 다양한 기준에 영향을 받는다. 이번 즉흥적 선택에는 추위가 큰 역할을 했다.

'여행지에서의 즉흥성에 추위가 기준이 됐다'는 말도 맞지만, '오늘의 내 감정과 마음을 수용하며 따라가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문장이 내 마음을 더 적확하게 표현한다고 하겠다.

오늘의 여러 결정은 겉으로 보면 지나치게 즉흥적이고 급격해 보일 수도 있다. 내 감정을 수용하기보다 지적 정보로만 판단하던 내 과거 습관을 기준으로 보면 말이다.

하지만, 마음을 따라 내린 선택이기에 내 기분은 깊고 고요한 바닷물에 몸을 둥둥 띄우고 흘러가는 것만 같이 평온했다.

이런 순간과 경험이 더욱 많이 쌓이기를 원한다.



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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