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세는 따뜻함으로 가득했다.
따뜻한 온천, 그보다 더 따스했던 소통
기대을 안고 온천으로
오늘은 정말 기다리던 오렌세 야외 온천에 몸을 담그러 출발했다. 어제는 시내도 둘러볼 겸, 중심가의 온천에서 뜨끈한 물에 손발만 담가보았다. 갈리시아 지역 음식인 뽈뽀(문어요리)도 먹었고, '부드럽고 맛있지만, 문어는 내 취향이 아니군.'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은 온천을 다녀오는 것 외엔 호스텔 무료 조식과 슈퍼음식으로 하루를 보내기로 정했다.
아침으로 토스트, 시리얼, 코코아를 든든히 먹고 온천으로 향했다. 면세점에서 사고 아직 입지 않은 수영복과 수건을 챙기고 물까지 준비라니 충분하다 생각했다.
가장 멀리 있는 온천에 차로 갈 수도 있었지만, 강변을 따라 걸으면 유/무료 온천들이 여러 개 있어 걷기로 했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강변을 따라가는 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마드리드나 오렌세의 시내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였지만, 강변 공원은 낙엽과 단풍으로 가을이 물씬 느껴졌다. 시간이 역행한 듯한 기분이 들었고, 도시 조명과 분리된 자연색감이 시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가면서 크지 않지만, 강과 바로 맞닿아 있는 무료 온천을 발견했다. 탈의실이 없었고, 여행객은 보이지 않았지만 현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온천을 즐기고 있었다. 강과 닿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계속 가보기로 했다.
다음 스팟은 온천수를 길어 올리는 우물 펌프였는데, 포근한 기운을 손에 담아보곤 계속 걸었다.
-
친절이 채워준 하루
사실 가장 끝의 온천까지 40분 정도 거리였는데, 가는 길에 처음 보는 식물, 새소리,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산책 중인 다양한 대형견을 보느라 시간이 많이 흘렀다. 강가로 내려가는 길도 걸어가 보고, 설치된 운동시설도 이용하다 보니 2시간 반 이상 걸렸다.
가는 길에 아주 큰 유료 온천장이 있었다. 여행객이 많아 관리가 잘 될 거라 예상됐지만, 끝까지 가보고 싶어서 더 걸었다. 도착한 곳도 꽤 맘에 들어 바로 탈의실로 향했다. 개인 자물쇠를 챙겨 왔어야 한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잠그지 않고 사물함을 이용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걸어 나갔다. 수영장이 아닌 야외 온천에서 수영복만 입은 것은 나에게 어색한 일이었지만, 사실 다들 그렇게 입고 있으니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온천탕으로 가는데 한 사람이 내 발을 가리켰다.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상황상 슬리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변을 보니 모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미리 확인하지 않아 발생한 일이었지만, '아, 슬리퍼 사서 내일 다시 와야지.' 하고 뒤돌아섰다. 그때 한 사람이 슬리퍼를 빌려주었다. 고마웠지만 영어 소통이 되지 않아 언제까지 돌려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무릎까지만 담그는 정도로 온천을 짧은 시간 즐기고 끝내기로 했다.
앉아 있는 동안 온천을 관리하듯 보이는 옷을 입은 청년이 다가왔다. 구글 어플로 말을 걸었다. 처음엔 스페인어-영어 번역 모드로 말을 걸었고, 구글 어플을 이용하고 있노라니 이왕이면 스페인어-한국어 번역 모드면 했다. 그래서 "잠깐만!"이라 말하고 핸드폰을 가지러 탈의실로 뛰어갔다. 내가 내 폰을 가져오는 사이 그 친구는 일본어를 다운로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며 내 핸드폰을 사용했다.
티비에서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해외여행도 문제없다며 광고하지만, 나는 어플로 대화하는 게 좀 낯설었다. 그런 내게 이 대화는 구글 어플에 대고 소통하는 첫 경험이 되었다. 신기했고 재미있기도 했다. 대화모드를 눌러보니 근처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대강 입력되어 대략 어떤 대화를 하는지 알게 되었다.
-
내 손 안의 통역사, 구글번역기
이후 숙소로 돌아와서, 엄마와 통화하며 오늘의 경험을 쫑알쫑알 말했다. 또, 따뜻한 히터가 나오는 방에서 혼자 침대에 앉아 귤을 야금야금 까먹었다. '아 저녁 재료 사러 나가야 하는데.'라고 생각이 드니 마치 내 집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첫날 갔던 마트로 향했다. 처음에는 뭘 대단히 만들어 먹으려던 생각이었지만, 이틀 전 먹은 치킨 오븐구이 옆에서 돼지 폭립바비큐를 보았다. '요리는 번거롭지. 갑자기 폭립이 더 끌리네.'라며 결정을 바꿨다. 샐러드 야채를 함께 샀다. 다음 날 샐러드도 먹을 겸, 폭립을 먹을 때 상추 대신 먹고 싶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서 폭립과 쌈 야채를 함께 먹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갑자기 본 돼지고기가 삼겹살을 먹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게 했다. 비행기에서 아주머니들이 챙겨준 고추장을 떠올리며 슬며시 웃었다.
대형 마트에서 슬리퍼를 살 수 있을지 궁금했다. 사실 욕조 슬리퍼만 있으면 대충 사서 신을 생각이었다. 스포츠 브랜드 매장을 찾아 헤맬 정성은 없었다. 그런데 돌아다녀도 슬리퍼를 찾을 수 없었다. 한 청년이 도움 필요하냐고 물어서 기쁘게 대답했지만, 그 한 문장만 영어였다. 그때, 자신 있게 구글 어플을 꺼내서 슬리퍼를 살 수 있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그 근처에 팔 곳을 덧붙여 물었더니, 나가서 위로 올라가면 상점이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다시 길을 올라가는데, 분위기가 상점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서 다른 슈퍼에 들어갔다. 거기서도 슬리퍼는 없고, 한 아주머니에게 구글 어플로 질문을 했더니 방향을 가리키며 20미터 정도 가면 있다고 했다. 그 방향을 보니 반대방향이었다.
'아까는 올라가래서 오르막길을 걸었는데 높이의 의미가 아니었나 봐. 북쪽이라던지, 뭔가 다른 기준이 있었을 테지'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슬리퍼를 팔 것 같은 상점은 못 찾았지만, 문구점을 발견했다. 구석에서 멀티탭이 보이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갔다. 동아시아 계열인 듯한 외형을 가진 분들이 주인이라서 혹시 한국계일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아니었다. 주인분은 연세가 많아서 어플도 어색해했고, 10대로 보이는 소녀는 주인 옆에서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것이 딸바이브였다. 소녀가 슬리퍼를 찾아 주었고 덕분에 맞는 신발을 구입할 수 있었다.
-
오늘은 다양한 친절이 나의 하루를 완성했다. 온천장에서의 슬리퍼를 빌려준 남자, 슈퍼마켓 직원들, 잡화점 소녀까지. 무엇보다 온천장에서 처음 구글 어플로 말을 걸었던 그 사람 덕분에 시작된 '내 스페인어 통역사, 구글 어플' 경험까지. 오늘의 친절들이 모여 재미있고 알찬 하루가 되었다.
즉흥의 묘미는 정말 예측할 수 없는 것들에서 온다. 오늘은 이런 일들이 발생할 줄이야.
예상치 못한 변수들과 친절은 나의 여행을 따뜻하게 채웠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친절, 기술을 이용한 새 소통의 방식 등이 모두 모여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여행은 결국 소통하며 만들어지는 기억의 모음집이다. 그 뻔한 사실을 피부로 생생히 느낀 하루이다.
24.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