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세로 가는 여정 중 생긴 일

역동적이지만 잔잔한 에너지의 흐름

by 라영이

나는 내 안의 에너지가 평온하게 흐르길 원한다. 에너지는 파도처럼 조용히 차오르고, 물결처럼 소리 없이 사라진다. 이런 에너지를 다루는 일은 마치 도자기 속의 물을 다루듯 섬세하다. 도자기가 깨지지 않고 크게 흔들리지 않아 물이 쏟아지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의 나는 결과를 우선시하는 효율주의자에 가까웠다. 프로젝트에서 리스크를 고려한 계획을 세우긴 하지만, 빡빡한 일정 속에서 일을 하나씩 해결하면 성취감을 느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평온이라는 내 감정은 후순위였고,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다정할 정서적 여유는 사치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어떤 일이든 내 평온을 지키며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도록 에너지를 비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지켜야 할 핵심이 바뀌었다. 일이나 상황에 쓰이는 에너지는 내가 나를 돌보고, 관계를 소중히 하는 등의 기본적으로 확보해야 할 에너지를 침범할 수 없다. 나는 아픈 몸을 돌보며 변했다.

내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요소는 다양하다. 일단 그날의 체력과 정신에 따라 달라진다. 소소하게는 후덥지근한 더위나 거센 바람조차도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여유로운 준비로 에너지 흐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에너지를 채운 후 여러 일을 해내며 흐름이 깨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다. 여유로운 시간 배분은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해도 에너지가 과도하게 소모되지 않게 해 준다.

에너지가 어느 정도 차오른 상태라면 예상치 못한 일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에너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평정심이 깨지고 다정한 표현조차 힘들어지는 예민한 상태가 된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Protect my peace'를 되새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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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쓰이는 에너지, 그리고 채움

오렌세로 떠나는 날이다. 짐은 1차로 어제 정리해 두었고, 티켓은 여유 있게 이동할 수 있는 시간대로 예매했다.

그러나 짐을 싸는 순간부터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겨울옷을 추가로 샀더니 캐리어가 잘 닫히지 않았다. 결국 캐리어 위에 올라타서 겨우 닫았다. 체크아웃 후 가볼까 했던 브런치 가게에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지금 멈추지 않고 미리 기차역에 간 후 식사를 하면 더 맘이 편하지.'란 생각이 들었다. 배도 고프지 않아서 나는 역으로 직진했다.

오랜만의 유럽.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을 깜빡했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니 예상보다 힘들었다. 한 남성분의 도움을 받으며 그 순간 감사를 느꼈다. 에너지는 소모되었지만, 뜻밖의 도움을 받아 다시 충전되었다.

기차역으로 가는 지하철 1회권을 사려했지만, 영어 지원 기계가 고장 나 있었다. 스페인어로 티켓을 사야 했지만, 다행히 성공했다. 작은 성취감을 느꼈다. 이처럼 가는 동안에도 크고 작은 에너지를 쓰고 채우는 과정이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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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 속에서도 중심 잡기

기차역에서 호스텔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물쇠 보증금을 돌려주기 힘들단 연락이었다. 갑작스러운 영어통화는 집중을 요했다. 식사할 시간이 줄었지만 중요하진 않았다. 오히려 약간 긴장하게 되어 미리 플랫폼 안내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플랫폼이 변해 이동시간이 15분 정도 더 소요되는 상황이었다. 작은 긴장이 여유로운 일정을 불러왔단 생각에 마음이 더 평안해졌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기차가 고장 나 새 기차를 기다려야 했다. 안내는 스페인어로 진행됐다. 그래서 웅성 되는 사람들과 멈춘 기차로 인해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처음에는 상황 파악이 안 되었다. 승무원을 찾아 상황을 이해했다. 지연이 발생했지만 다른 사람들 움직일 때 눈치껏 따르면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속 편히 강아지 승객과 시간을 보내고 기차역 산책도 했다.

그 순간, '기차가 고장 나도 마음이 크게 요동치지 않네? 나이가 들었나? 경험이 쌓였나? 그냥 내가 평안을 유지하는 힘이 조금은 성장한 걸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기분 좋은 느낌이 함께 들었다.

한 시간이 넘는 대기가 이어지며 허기가 몰려왔다. 새벽에 먹은 샐러드가 전부였던 나는 몸이 점점 힘들어지는 걸 느꼈다. 유럽 여행이면 쟁여두던 신맛 하리보와 솔티카라멜초콜릿을 안 산 것이 아쉬웠다. 그렇게 에너지가 조금씩 떨어지는 와중에도, 큰 흐름은 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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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전과 감사

오렌세에 도착한 시간은 예상보다 두 시간 늦은 6시 반 경이었다. 기존의 갈리시아 문어 요리를 먹겠다는 계획은 사라졌고, 지금 당장 충전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호스텔 앞에서 고기를 먹으려 했는데 식당의 저녁타임은 8시라고 했다. 근처 대부분이 그랬다. 당장 충전이 필요했던 나는 마지막 에너지를 꽉 붙들어 매고 슈퍼로 향했다. 바로 먹을 수 있는 것이 탄수화물 외에도 오븐구이윙봉이 있어서 갑자기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거의 한 마리 양쯤 되어 보이는 치킨을 한 자리에 앉아 다 먹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하루 동안 에너지를 쓰며 겪은 다양한 일들이 감사함으로 변했다.
예상한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작은 기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물론, 예상 밖의 일에서 나를 지켜낸 경험은 큰 기쁨이라는 마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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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지키며 하루를 마치다

여행은 늘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로 채워진다. 오늘은 가장 많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쓴 날이었다. 그렇지만 내 에너지 그릇은 깨지거나 엎어지지 않았다. 크고 작은 경험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소모와 충전을 반복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나는 여행을 통해 에너지가 흘러가는 방식을 배운다. 소모하고 채우며, 때로는 멈춰 쉬면서. 이런 흐름 속에서 평온을 느끼고 안정감을 배워간다. 결국, 삶도 여행도 이런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2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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