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의 느긋한 하루
여유로운 여행은 마음에 새겨진다.
마드리드로 돌아오면서 나는 사실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만 안 빠뜨리고 가면 된다는 막연한 일정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그저 가볍게 흘러가는 대로 두고 싶었다.
하나, 숙소를 예전과 다른 곳으로 정해 새로운 동선을 그려보기.
둘, 마드리드의 긴 시내버스 노선을 타고 아무 동네나 돌아다니기.
셋, 어디 공원 하나 찾아가 멍하니 앉아 있기.
그렇게 별것 없는 계획을 품고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그러나 호스텔에 도착한 오후, 무거운 짐으로 낑낑거린 나를 귀여워한 사람들 덕에 그날 저녁은 화려한 파티의 주인공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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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시끄럽다는 리뷰에 반신반의하며 예약했던 호스텔은 의외로 조용했고, 덕분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새로 온 룸메이트를 만났다. 칠레에서 온 루시아. 이 호스텔의 volunteer로서 두 달간 무료로 숙식하며 일을 한다고 했다. 단어 그대로 자원봉사자라고 해석하는 건 적합하지 않은 것 같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국에서 고시원의 데스크를 맡고 숙식을 제공받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출장으로 칠레에 다녀왔던 경험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적당히 느슨한 연결만 선호하는 내게 루시아와의 소통은 딱 좋았다. 서로 부담스럽지 않게, 필요한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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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니 한 친구가 오늘 계획을 물었다. 나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을 갈 예정이라고 답하며, 나머지는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친구는 마드리드 사람들도 많이 찾지 않는 조용한 공원을 추천해 줬다. 레티로 공원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진짜 평화로운 곳이라며 지도까지 보여줬다.
하이파이브로 웃음을 나누며, 느긋한 하루를 만들어갔다.
공원에 도착했을 때, 말로만 듣던 ‘조용함’이 정말로 느껴졌다. 정문은 수리 중이라 조금 돌아 들어가야 했지만, 그조차 여유로웠다. 쾌청한 날씨 아래 공원은 온전히 나를 받아주는 듯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참 동안 아무런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귤 한 알을 까먹고, 작은 도넛을 베어 물며, 순간의 평온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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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로 돌아오니 빠에야 파티가 한창이었다. 루시아와 그 친구들이 마련한 파티에서 샹그리아를 몇 잔이나 마셨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웃음과 대화가 넘치는 밤이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그리고 삶의 방식이 어우러져도 괜찮았다. 그렇게 느긋한 하루는 생각보다 훨씬 풍성하게 나를 채워주었다.
마드리드에서의 이 하루는 시간이 지나 특별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것 인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날 하루 여유롭고 평안하고 자유로운 날을 보냈다. 이 느낌이 내 안에서 너무 가치롭게 새겨졌다. 꼭 거창한 의미나 목적을 발견하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하루.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마주한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그 순간의 감정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마드리드는 그렇게 나를, 내가 되는 시간을 가만히 허락해 주었다.
24.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