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활 타다.
[소년이 온다 - 한강] 활활 타다.
아야 서운아, 아부지 오셨다이. 얼굴에는 제법 처녀티가 나는데 몸집은 조그만 소녀가 마루에서 발딱 일어났다. 수원(水源). 그녀에게는 서당에서 훈장을 하며 여생을 보내시는 선비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좋은 이름이 있었지만, 늘 서운으로 불렸다. 그녀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 어머니가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고 했다. 사내아이를 기다렸던 집안 어르신들은 조그맣고 하얀 여자아이가 사랑스러운 몸짓을 할 때마다, 아고. 저거 서운타. 서운혀. 남자로 태어났으면 아조 예뻤을거인디 서운혀. 해서 아이를 서운이라고 불렀다. 사실 이름마저 이 애석한 별칭을 따라지었을랑가도 모른다. 그녀는 늘 그것이 서운했다. 그러나 그날 그녀는 어매에게 입도 뻥긋 못했다. 댓돌을 밟고 마루로 올라서는 아버지의 얼굴이 초주검과 같았다. 1980년 5월. 광주로 출장 갔던 아버지가 귀가 날짜를 이틀 넘게 넘기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전화 한 통, 집에 기별도 없이, 집을 비우거나 출근을 거를 사람이 아니었다. 광주에서 도청으로 출장 갔다가 곧장 집으로 오시기로 한 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자, 그녀와 쪼까난 동생들은 아부지 뭔 사고 난 거 아니요? 어쩌 진짜 사단이 났는갑서. 나가서 찾아봐야 되는 거 아니요? 했다가 등짝을 두들겨 맞고 마루에서 울며 졸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뭔 일이요, 뭔 일이 났간디 이려요. 움푹 패인 아버지 얼굴이 무서워서 아이들은 마루에서 안방 창호지에 귀만 바싹 댔다. 아버지는 그러고도 이틀, 더 출근하지 못하셨다. 뭘 먹도 안 혀, 서운아 너거 아부지 누룽지락도 잡수라고 혀라.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상을 물렸다. 엄마, 오늘 공원에서 봤는데 왜 군인들이 광주에서 사람들을 많이 죽였어? 하고 묻자 엄마는 이 이야기를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무당벌레가 왜 무당벌레인지, 책에 있는 나무에는 매미가 사는지, 왜 서당 선생님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하는지, 척척 대답해 주던 엄마였다. 엄마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엄마도 그들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몰랐으니까.
1979년 10월 26일, 18년간의 독재가 끝났지만 독재자가 아들처럼 아끼며 사랑했던 다른 군인이 집권할 것이라는 소식이 파다했다.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세력들이 민주화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5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민주화운동이 전개되고, 광주에서는 전남대와 조선대 재학생들의 주도하에 시민들이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연일 개최하였다. 시위의 규모가 점점 커지자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국단위의 계엄을 선포하고 항쟁의 주도자들을 연행한다. 광주에는 17일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18일 자정을 기해 주도세력이 체포, 연행되기 시작한다. 이어 계엄군은 학교를 점령하여 학생들을 연행하고, 언론사와 기관을 장악한다. 이에 저항하며 전남대 정문에 시민들이 집결하자, 계엄군이 첫 무력 충돌을 일으키고, 공수여단이 추가 파견되어 가두시위에 참여한 자들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연행한다. 계엄군이 계속하여 파병되고, 발포가 이행되면서 사상자는 급증, 도심에서 민가까지 폭력이 번진다. 일부 도시를 빠져나간 인사들이 전라남도의 타 지역에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자 타 지역에서 무기를 빌려주는 등 물질적 원조를 하고, 광주를 중심으로 항쟁이 전남 전체로 퍼져나가는 형식으로 정신적 원조를 보탠다. 21일이 되자 계엄군은 잠시 물러난다. 시민들은 방어를 위해 필수인원에 한하여 총기를 갖추는 등 시민군으로 발전하여 사망자가 유족 손으로 수습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실종자, 상해를 입은 자도 파악하는 등 자치적으로 도시의 체계를 유지한다. 사상자 수는 계속 늘어나는데 자치를 시행하는 조직은 터무니없이 작으니 미성년자들이 자처하여 도청에 합류하고, 어머니들이 보잘것없는 식사를 날라 아이들과 시민들을 먹이기 시작한다. 잠시의 평화는 금방 지나가고, 27일이 되자 그동안 기습적, 간헐적이나마 계속해서 폭행을 자행하던 계엄군은 이른바 충정작전을 개시한다. 도청을 지키고 있던 다수의 시민군이 방어를 위한 응대 사격을 하지 않았음에도, 군대는 무차별 사격을 실시하여 도청을 점령하고 항쟁을 종결시킨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초상집이여. 그니까네 어떡하거던 그날 피해 안 본 사람이 없다 이 말이여.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그들을 배웅한 지도 40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항쟁으로 인한 상처의 규모는 정확히 파악되지 못했으며, 부정확한 이 통계에 따르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을 포함하여 총 7716명이 직간접적 피해를 입은 것으로 확인된다. 대중에 잘 알려져 있는 <택시 운전사>, <화려한 휴가>에서 언급되었듯이 이 일은 목숨을 걸고 광주로 뛰어든 외신 기자들에 의해 기록, 해외로 전파되고, 영정 사진을 끌어안은 아이, 천진히 웃는 아이를 말끄러미 바라보는 군인의 사진이 외신을 연일 달구면서, 아주 작은 아이들까지 이 항쟁에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음을 증명한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품에 안은 아이는 어떻게 자랐을까. 어디에서 이 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2011년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다.
한강의 작품들은 뛰어난 필력, 눈에 보이는 듯한 생생한 묘사, 선연한 색채감 등 특유의 스타일이 원망스러울 만큼 혹독하고 시리다. 그리고 <소년이 온다>는 뜨겁기까지 하다. 작품은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표현되었던 비극적인 역사,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아, 이미 얼마간의 눈물을 예견하고 책상에 앉은 독자를, 특유의 덤덤함으로 마치 따돌리듯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슬픈 이야기가 이토록 가슴 아픈 일이었던가 생각하게 한다. 새삼스레, 가슴이 찢겨 고통스러울 만큼, 새로운 방식으로 아프다. 백 퍼센트, 완전 무결하게, 오로지 신념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큼성큼 아비규환 속으로 걸어 들어온 소년. 어른들이 왜 이렇게 싸우고 있는지, 어째서 친구를 죽였는지, 알지 못했던 이 작은 아이도 항쟁에 목숨을 건다. 강한 신념으로 항쟁에 뛰어든 어른은 때로 살고 싶다는 고통에 몸부림친다. 상무대에 갇혀 잘 먹지 못하는 어린 학생은 재판장에서 노래를 부른다. 애국가를. 때로 신념보다 더 강한 것들이 존재를 죽음 앞에 초연하게 한다. 피를 흘리는 친구에게 뛰어가 붙잡지 못하고 난사하는 총알을 피한 것이 괴로워서, 며칠을 씻지도 못하고 시취를 견디는 처음 보는 누나들을 두고 갈 수 없어서. 도청에서 픽픽 쓰러져 가는 옆 사람도, 그리고 나도, 더 잘 살고 싶어서, 그래서 죽기 위해, 도청으로 나왔기에. 작은 새 같은 영혼은 어떤 설명도 예고도 없이 자신을 도려내는 총알을, 몽둥이를, 받아낸다. 두렵지만, 약속했으니까. 살고 싶으니까. 함께 하고 싶으니까. 사랑하니까. 어떤 가치를 위해 죽음에 투신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아름다운 몸짓을 꺾어 짓밟을 만큼 비이성적인 폭력이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비단 우리 역사의 비극의 한 장뿐만 아니라, 인류와 인류가 겪어 온, 있는, 갈, 모든 시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의 외피를 빌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 그들은 왜? 에 왜 대답하지 못하였는지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은 마음 쓰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 목숨을 걸만큼 삶 앞에 순수하기도 하지만, 그런 순수에 무차별적 폭력을 기동 하게 하는 잔인한 면모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게서 봤듯이, 악은 평범하다. 아무렇지 않게 존재에게 접근하여 그의 의식을 사로잡는다. 악의 평범성은 집단의식에 편승할 때 그 힘이 증폭되며, 모든 계엄군이 그러하지 않았으나, 증언이 대부분의 군인이 최소한 방조자였다는 데에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누구에게도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훼손할 권리는 없다. 그저 우리는 다른 채로 나란히 존재해야 한다. 동일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폭력적 자아를 인정해야 하고, 무엇보다 그 자아가 발현되던 시점, 무고하게 피 흘린 수많은 소년들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피가 흘렀으나 이 운동은 우리 사는 세계의 절대다수에게 큰 의미가 있고, 살기 위해 죽었던 이들의 목표를 이루게 하였으며, 이 땅의 민주화에 기여했고, 종국에는 성공했다. 그리하여 죽어진 목숨을 희생자(희생을 당한 사람)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투쟁의 승리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잊는 것은, 이 역사를 외면하는 것은, 우리가 그 피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악의 배신이다. <소년이 온다>의 야속하게 차분한 문장들 속에서 나는 다짐했다. 배신하지 않겠다고. 잊지 않겠다고. 우리 사는 세계가 민주(民主)와 다양성(多樣性)의 보장을, 자유를, 피로 쟁취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로, 힘 없이 악의 평범성에 점령되지 않은 세계로 나아가도록, 내 작은 몸짓을 보태겠다고. 왜? 에 대답하지 못하는 모든 폭력에 항거하겠다고. 소년이 되어 그 세계로 나아가겠다고. 활활 타겠다고.
책을 덮고 한참을 꺽꺽 소리 내어 울면서, 다시 거실에 앉아 엄마에게 묻던 날을 생각했다. 티비랑 라디오에서 왜 그런지 안알려줬간디?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외하나씨도 모르고 갔단다. 그래, 거기서 그렇게 사단이 난 줄 알았더라면 출장이었어도 안가셨을거여.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주변 도시에서도 알 수가 없었어. 걸어서 산을 넘어서 나오신 모양이다. 나중에 사진 보니까, 버스가 다닐 수나 있간디, 도로마다 군인이 쫙 깔려있었어. 아마도 담양에서나 버스를 타고, 왔을랑가. 어디까지 걸었을랑가. 완벽하게 지우지 못한 전라도 사투리가 힐끗힐끗 보이는 깨끗한 서울말로 말을 맺으며, 엄마는 내 눈은 안 보고, 손끝만 봤다. 5월이면 5.18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공원과 교육관에 갔다가 패밀리랜드로 가는 것이 광주로 가는 소풍 코스였다. 중학생이 되어서 초등학생 때 못 봤던 사진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냥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할 때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가 필요하다고 배웠는데, 잔인한 사진들에는 왜? 의 대답이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갈가리 찢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달았다. 이유가 있어도 안될 일이지만, 심지어 이유도 없이. 함께 묵념하고 기념관을 구경시켜 주며 우리를 안내해 주고, 그날을 전후로 20년간 이어진 끝없는 폭력의 역사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신 선생님께서도, 이유에 대해서는 대답하시지 못했다. 물어보지 않았어? 뭣을 봤는지. 안 여쭤봤어? 서운은 그날을 회상한다. 움푹 패인 아버지의 영혼을. 세상에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도 있나 봐. 시간이 지나도 낫지 않는 상처와, 씻을 수 없는 고통이. 그것을 일깨울 용기도, 권리도, 엄마한테는 없었다. 서운의 아버지는 어느 날 훌훌 털고 일어나, 그 이름이 내린 상들과 그 이름이 적힌 서류들을 긁어모아, 다 내다 버렸다. 종이는 태웠다.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 이름을 증오했다. 티비를 보다가도 아픈 얼굴이 가끔. 활활 탔다. 소년은 온다. 기억한다.
* 이 글은 광주광역시 5.18 사료편찬위원회의 <5.18 민주화운동> 등 다수의 문헌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