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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22. 2024

사랑의 모순. 재가 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도.

<재와 물거품>, 김청귤, 2021

[재와 물거품 - 김청귤] 사랑의 모순. 재가 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그래도.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그 변화가 어느 쪽을 향하고 있든, 꾸준히 이어져 갑자기 도드라진다. 사랑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사랑하던 사람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20대 중반에 교제했던 K가 그랬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사랑도 마찬가지였으며, 빠르게 내가 선 방향으로 뛰어왔다. 나와 그 사이에 놓인 간극이 좁혀질수록 나는 그를 잃어간다는 감각에 시달려야 했다. 함께 있는데도 내가 너무 사랑하는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타인에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고, 그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뿐 재단하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내 오만은 보기 좋게 구겨졌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던 그는,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입이 걸어졌다. 한숨을 자주 쉬고 미래를 걱정했다. 사업의 결실은 성공적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지옥이었다. 그가 보내는 일주일의 대부분을 그와 나의 사랑이 채웠고, 따라서 나는 그의 변화가 이 사랑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도무지 문제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진짜 오만은 사랑의 힘에 대한 과신이었을까. 한 줌이 되어버린 기억을 종종 들여다보며 괴로웠다.
 
김청귤의 <재와 물거품>은 그 시절의 나를 떠오르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변해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연인의 비애. 함께 하고 있어도 짙어지는 공허함과 고독. 둘 중 누구 한 명도 악인이 아니고, 책임질 원인을 제공하지 않아서 더 비극적인 비가. 본작은 <인어공주>, 중세의 유럽에서 자행 됐던 마녀 사냥, <별주부전>, <효녀 심청>, 한국 특유의 샤머니즘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고, 다층적으로 서사와 인물을 구성한다. 그러나 단순한 오마주나 차용에 그치지 않고, 이에 퀴어 코드와 역할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관계를 삽입하고, 핍진성과 개연성이 높은 흐름을 구사하며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를 무너트리는 전개 방식을 채택하는 등, 언어에 일정한 기준을 두고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나아가 본작이 오마주 하는 기존의 이야기들을 접하면 으레 예상하게 되는 결말을 가볍게 비틀기도 한다. 무녀였다가 마녀가 된 마리(갈 마 摩, 다스릴 리 理)가 제 속에 타오르는 불 때문에 재가 되고, 인어였다가 인간이 된 수아(물 수 水, 맑을 아 雅)가 제 안에 일렁이는 물 때문에 물거품이 된다는 작은 결말들은 복선이 아니라 반전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 반전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수아의 바다처럼 짭조름하고 마리의 신당처럼 씁쓰름하다. 내가 지켜본 해피엔딩 중에 이토록 처연한 장면은 없었다.
 
사랑의 모순. 내가 사랑했던 너의 모습은 네가 나를 사랑할수록 재가 되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마리는 무녀였던 생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무참히 화형을 당해 한을 품은 마녀가 되어버리고, 한 줌 재가 되었다 다시 마녀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한편 수아는 무녀였던 마리, 다시 태어나 기억을 잃어 영원을 믿지 않는 마리, 수아를 잃은 기억 때문에 수아에게 집착하는 마리를 위해, 그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동안, 인간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이 존재이유였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잃어버린다. 금방이라도 깨어질 것 같은 물거품이 되었다가 다시 인간이 된 슬픈 인어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수아와 마리는 서로를 너무 사랑해서 상대가 어떤 모습이든 사랑한다. 또한 마리와 수아는 서로를 너무 사랑하지만 생각한다. 너를 잃지 말아 줘. 내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 우리 사랑이 깊어질수록 달라지는 너마저 사랑해. 그 또한 너니까. 그렇지만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줘.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적응은 생존을 위하여 인간이 갖춰야 하는 필수 덕목이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혹은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스러웠던 모습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어떤 누구에게도 '괜찮은 것일 리 없다'.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그러나 그 변화가 이런 식으로 일어나서는 안된다. K를 지켜보는 나의 마음도 지옥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사랑의 모순. 마리와 수아에게는 서로밖에 남지 않고, 둘의 세계가 겹쳐져 만든 세계에 집중하느라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생(生)은 외면한다. 각자 허공에 그리던 두 포물선이 만나 작은 점을 만들고 그 점이 이야기가 되고 사랑이 되고 우주가 되는 동안, 포물선은 점을 지나 나아갈 공간을 잃어버리고, 두 포물선을 잃은 세상도 조금씩 달라진다. 사랑은 공존 그 자체지만 사랑 밖에 있는 삶의 요소들과 공존하지 못할 때는 배타 그 자체일 때도 있다. 그들이 달라지고 있는 세상을 외면하고 자신들만의 사랑이 가득한 우주에 적응하는 동안, 세상도 그들이 없는 생태계에 적응한다. 둘만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위하여 기도하던 마리와 사람을 위하여 분주하게 바다밑을 헤매던 수아는, 세상에 대한 사랑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연인은 온 우주 도처에 가득한 것이 사랑인 것을, 어떤 사랑은 그들이 있어야 완성되기도 한다는 것을, 너무 먼 길을 돌아와 확인한다. 사랑의 확장. 그러나 세상은 공백에 꾸준히 적응해 왔고, 둘을 위한 자리를 거의 남겨 놓지 않다. 수아는 이기적인 인간 군상을 견딜 수 없어하고 죽여버리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수아를 바꾼 것은 그들의 사랑이기도 하지만 변한 세상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수아 스스로의 선택에 기인한다. 그러나 마리는 변해버린 수아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발견하고, 그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낀다. 마리는 수아의 변화가 전적으로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수호신으로서의 수아의 모습을 찾게 해주고자 한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파괴해야 하는 것이 다정한 사랑의 잔인한 뒷모습이다. 사랑의 모순적인 민낯이다.
 
본작은 사랑의 본질에 대하여 전에 없던 기발한 이야기를 통해 고찰하고 있다. 사랑의 모순. 사랑 때문에 사랑받던 모습을 스스로 잃어버리고, 그래도 여전히 사랑받는, 모순의 지난한 생존력. 서로 지극히 다른 존재가 서로에게서 색다른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끝내 사랑하기 때문에 닮아간다는, 모순의 지독한 지속력. 그리고 물과 불의 사랑. 두 원소는 상극(서로 상 相, 이길 극 剋)이지만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존재 의미를 지닐 수 있고, 실존할 수 있다. <엘리멘탈>을 떠올리게 하는 이 설정은, 인간은 서로 다르다는 점, 그 때문에 산다는 것은 사랑과 다정함을 필요로 하고, 인간은 그에 기대 타인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또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점차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됨을 포괄적으로 함축한다. 생이 이어진다는 기계적인 장면은 사실, 유기체의 내부 작용과 유사한 형태의 분주한 상호작용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엘리멘탈>의 웨이드와 앰버 또한 서로를 사랑하는 경험과 세상을 유지하는 다정한 이웃들 덕분에,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지, 무엇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알게 되고, 이 앎에 힘입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간다. 다름은 사랑과 다정함을 낳고, 각자 다른 이름을 낳으며, 이것들이 쌓여 세상은 나아간다. 마리는 수아의 이름을 지어주고, 수아는 마리의 이름을 불러준다. 영원한 것은 없고, 사랑받던 모습 또한 무(無)로 돌아가기 마련이며, 사랑에 힘입어 힘들여 달라진 뒤에도 모두는 여전히 서로 다르지만.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정답 없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을 태워서라도, 불에 닿아 해무로 흩어져서라도, 그들은 사랑으로 돌아간다.
 
삶은 거대한 모순이다. 정답이 없으나 나름의 답을 찾아야 하는 긴 터널이다. 내가 나이기 위하여, 사랑받았던 내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하여, 내 사랑 때문에 나를 잃지 않기 위하여, 그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찾기 위하여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는 기나긴 침잠의 시간이다. 내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절망적인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 수는 없다. 수아와 마리가, 마을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로 적당한 혼처를 찾아 기계적으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후계자로 삼아 철저히 양성하는, 진부한 굴레 안에 갇힌 무녀가 될 수는 없었던 것처럼. 서로가 있어야 온전해지는 순간만이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는 이유로, 기꺼이 죽고 되살아나 연인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던 것처럼. 이제야 고통스러운 사랑의 길로 되돌아오는 연인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늙었지만 어린 연인이, 초콜릿을 애써 끓이고 다시 물로 차갑게 식혀 만들어야 하는, 달콤하지만 여전히 여린 입천장을 뜨겁게 달굴지도 모를 초콜릿 퐁당을 좋아했던 이유를 희미하게 이해한다. 어쩌면 끝내 어떤 사랑도, 어떤 이름도, 적어 내려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다시 돌아간다, 사랑으로, 생으로.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는 순간들이 모여 영원이 된다.
 
 
"영원은 여기 있어." p. 78
 
자신의 사랑은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몰랐던 그때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한 생명을 구하고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무겁고 행복한 일인지, 그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얼마나 서글프고 비통한 지 다 마리를 통해 알았다.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마리가 너무 슬퍼하지 않으면 좋겠다. p. 78~79
 
"세상은 다정한 사람들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 게 분명해." p.140
 
마리의 한과 수아의 서글픔이 조약돌처럼 동글동글 깎여 가던 중에 누군가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말했다. p.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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