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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23. 2024

늙어버린 소년에게

<새의 선물>, 은희경, 1995

[새의 선물 - 은희경] 늙어버린 소년에게
 
어느덧 해가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간다. 사위가 조용했다. 시청이 노을 품에 안긴다. 시위가 끝난 모양이에요. U가 말끄러미 휴대폰을 확인하다가 무겁게 입을 뗀다. 버스랑 택시가 꿈쩍도 안 하는 거 보니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다들 고생이 많네요. 괜찮으면 지하철로 이동할까요? 나와 그는 짧은 소공동 산책 끝에 을지로 입구역으로 갔다. 걷는 내내 나는 다들 고생이 많네요. 하는 무심한 듯 걱정 어린 그의 말소리를 읊었다. 안국역에 내리니 비가 그야말로 쏟아진다. 몇 방울 맞았더니 정수리가 띵하니 아플 정도다. 그들은 우비 하나로 이 폭우를 견디고 있을까. 고담 시는 순식간에 스콜 속에 있는 아열대의 큰 도시로 변모한다.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아오. 뭔 비가 이렇게 쏟아져. 낮에는 시위한다고 난리더니. 어휴. 자 다 타셨죠? 출발할게요. 마을버스 기사님께서 친절하게 인사에 대꾸하다가 별안간 고충을 쏟아낸다. 코트 자락 끝에 빗방울이 축축이 묻었는지 종아리가 차가웠다. 물에 흠빡 젖어 오갈 곳 없는 작은 새가 된 것처럼, 마음이 오갈 데 없어져 U의 눈을 피해 조금 울었다. 짧은 이동 끝에 정류장에서 내렸다. 생각에 잠겼다가 앞서 내리던 U가 펼치는 우산 뒤통수에 이마를 박았다. 눈물이 또 찔끔 나왔다. 북촌은 호젓한 한옥마을의 모습으로 세찬 빗속을 담담히 버티고 서있다. 빗방울이 우산을 내려치자 우두두 드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빗소리로 우산도 뚫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폭우였다. 폭우에 젖은 몸을 한옥이 달게 삼켜주었다. 처마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고되어 보였다.
 
 
그날, 오갈 곳 없어 슬퍼진 마음을, 스스로 나의 견고한 가치관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흔들리던 순간을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손등을 두드리는 U와 먼 타국 땅으로 입양된 작가들이 자신을 떠나보낸 뿌리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담아 만든 작품들 덕분이었다. 설화수가 아트 마케팅의 일환으로 북촌 한옥마을에서 '흙, 눈, 꽃 - 설화, 다시 피어나다'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진행했다. 브랜드 이미지 개편과 밀도 있는 브랜드 메시지 전달을 위해 엄청난 자본을 투입해 큰 규모의 무료 전시회를 개최했다는 점이나, 흙, 눈, 꽃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꽃이 된다는 문장을 중심으로 마치 설화처럼 엮어내는 스토리텔링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새가 알을 깨고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 '나'를 찾듯, 여린 꽃잎이 자신의 뿌리에 대하여 고민하고 확인함으로써 긴 휴한기를 지나 씨앗에서 나와 창공을 향해 힘껏 대지를 박차고 싹 틔우는 과정이 담긴 듯한 작품들이 특히 인상 깊었다. 이민, 입양, 버려짐, 선택, 차별, 차이, 향수, 자신을 쓰게 뱉었지만 여전히 돌아가고픈 고국에 대한 애증. 작품에 고스란히 담긴 쓰린 마음들과 뿌리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를 확인하면서, 내 감정도 그들을 따라 만감의 교차로 위에 섰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답하기 위해 지나쳐 온 시간을 되짚어 올랐던 많은 이들을 생각했다. 시린 눈을 비비며 그 냉담한 역행을 견뎠을 뒷모습을 상상했다.
 
 
시간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도한 그 흐름 위에 자를 꾹 대고, 연필로 선을 확 그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픔을 딛고 극복하여 일어났다고 해서, 더 이상 그 시간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고 해서, 지나쳐온 시간을 댕강 접어 손톱으로 꾹꾹 눌러 찢어 책 사이에 끼워버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시간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준다는 말은 거짓이다. 아픔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리면 시간이 흘러 있을 뿐이다. 삶이라는, 자신이 본질적 자아와 합일하는 이 지난한 과정이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성취될 리 없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모두가, 누군가의 질문에 대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다. 일찍 자라 버린 채로 격동의 시대를 거쳐 어른이 된 아이의 입을 빌려 은희경 작가님의 <새의 선물>은 이야기한다. 90년대가 되었지만 세상은 69년, 진희가 외할머니와 이모 손에 길러졌을 때와 전혀 다를 바 없고, 자신도 그때 그 모습에서 자라지 않았다고. 또한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어린 진희는 인간은 계속 변하고, 때문에 인간들이 모여 이루는 세상도 계속 변해서, 무엇을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없는지에 대한 판단 또한 불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적어 놓은 목록을 한 항목씩 지우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는다. 그녀는 이미 열두 살에 믿을 것도, 못 믿을 것도 없이, 인간이 진심일 수 있는 상대는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주체는 자신뿐이라고도.
 
 
때문에 진희는 이미 타인들이 호들갑 떠는 기준으로 삶을 지배받지 않는다. 세상은 70년대가 되면서 지각변동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시대적 변화에 대비했지만, 진희는 60년대에는 아버지가 없다가 70년대가 되었다고 아버지가 있게 된 것은 70년대식의 대단한 농담에 불과하며, 시대라는 구획이 유의미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 내외의 시간이 7~80년대를 지나 9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유효했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더 이상 테레비가 있는 어떤 집 대문에 기웃거리지 않고도 누리호 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각자 선 자리에서도 지켜본다. 더 이상 학생들이 모여 민주화를 소리친다고 군대가 해산을 명령하며 최루탄을 쏘지 않는다. 물론 이 극복은 완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일부나마 우리가 이룩한 극복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시대가 변화했기 때문에 저절로 성취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밤새워 연구하고,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그 피를 끌어안고 내내 울고, 그 눈물들이 강이 되어 흘렀기 때문에.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성취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 세상이 조금 변화할 것이라고 게으르게 믿는다. 본 작은 이야기 한다. 시간에 끌려가는 삶 안에는 결코 의미가 열매 맺을 수 없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의 생각과 사회 구조가 저절로 발전할 수 없다. 69년부터 50여 년이 흘렀다. 시대는 변하지 않는다. 시대는 저절로 변하지 않는다. 시간보다 느릿느릿, 아주 조금씩 변할지라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시대를 변하게 한다.
 
 
Y랑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그 맥락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올드 보이>의 늙은 소년은 사실 오대수가 아니라 극 중 우진(유지태 분) 일 것이라는 대화를 나눈 적 있다. 사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어린 날에서 한치도 자라지 못한 채, 시간이 그 상처를 치유해 주지 못해서-거듭 이야기하지만, 시간이 약일 리가 없다-다친 상태 그대로 늙어버린 아이인 우진이 다름 아닌 올드 보이라고 생각한다. 올드 보이는 차마 자신을 당장 응징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응징하는 것은 유예하고, 누나의 죽음에 자신 다음으로 기여도가 높은 사람에게 복수를 단행한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과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을 자신이 겪었던 것과 같은 성질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유아적 발상은, 그가 댐에서 누나 손을 놓쳤던 날 이후로 더 이상 자라지 못했음을 방증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마음이 자라고 상처가 치유된다면, 그저 견디면 생을 살아낼 수 있고, 쉽게 자아와의 합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쉬운 방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생이 어려워야 그 의미가 풍부하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시간을 버티는 것만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낼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은희경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인 <새의 선물>에도, 우진처럼 아이인 상태로 멈춰 이십여 년을 살아낸 주인공 진희가 등장한다. 진희와 우진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있다면 진희는 이미 자신이 다 자란 상태라고 판단하고 스스로 성장을 결박시켰고 따라서 더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어른만큼이나 성숙한 상태에 놓여있으며 스스로가 그 시절에 멈춰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우진은 미처 다 자라지 못했을 때 불의의 사고에 의해 성장이 제한되었고 따라서 특정 시점 이후로 자신이 더 이상 성장하지 못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진희와 우진은 삶의 주체에서 결정적 차이를 보인다. 진희는 1969년에 이미 자신의 선택에 의해 '올드(성숙하다는 의미에서)' 걸이 되었다면, 우진은 영화상 현재 시점에 여전히 올드 '보이'고, 각각의 방점이 그들의 상태를 표상하는 올드와 보이에 찍히게 된다. 우진은 때로는 짓궂은 우연이 삶을 견인하고, 때문에 개인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타의가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삶에 개입하는 타의와 우연에 속절없이 굴복하며, 그 힘에 주체성을 박탈당한 나이만 든 소년에 불과하다.
 
 
반면 진희는 자신을 보이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분리하여 수챗구멍과 변소 구덩이를 오가는 쥐처럼 자신의 상황을 냉소적으로 비관하면서도, 심상하게 그러나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대단하지도 비천하지도 않은 회색빛 삶을 살아낸다. 그녀는 열두 살 때부터 현시점까지 내내 시대가 변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삶들이 모여 만든 세상의 관성에 굴복하지 않고, 주로 상황을 관찰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결코 삶을 방치하지 않는 성숙한 여자 아이다. 진희는 외할머니와 이모, 삼촌을 비롯한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사랑 속에서,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삶은 타인의 개입에서 자유롭지만은 않지만 그 주인은 자신 하나뿐이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자라지 못한 마음에 새살과 성장을 가져다주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랑이고, 삶에 대한 의지이며, 그리하여 삶 중에 진정으로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딱 한 명뿐이라면 그것은 스스로여야 한다. 삶의 운영 주체는 자신 하나뿐이어야 한다. 우진은 끝내 이를 깨닫지 못하고-물론 이것은 타인이, 아직 우진이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맞는 삶의 결정적 순간에, 우진의 삶에 개입하기 때문에 우진의 탓만은 아니다-, 진희는 깨닫는다. 우진과 진희의 이 차이점은 삶에 대한 태도의 결정적 차이로, 결말로, 귀결된다.
 
 
1995년에 제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본 작은 435쪽에 달하는 상당한 분량에, 진희, 진희의 외할머니, 이모, 삼촌, 삼촌의 친구 허석, 이모의 애인, 이모의 친구, 이모를 짝사랑하는 사람, 외할머니 댁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 이웃 사람들, 이웃이었다가 도망간 사람들, 학교 친구들, 학교 선생들, 마을 사람들 등 상당히 많은 사람들과의 다양한 일화를 다루고 있어서 내용을 요약하기가 곤란하다. 미처 다 꼽지 못할 만큼 좋은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남편에게 매일 같이 폭행당하는 것이 괴로워서 늘 가출을 꿈꾸며 버스 정류장에 나가 서있으면서도 끝내 버스에 오르지 못하고 먼지 구름 속에 망연히 남아 있는 광진 테라 아줌마의 모습이나, 마을에 있던 유지 공장 폭발사고로 죽은 이 선생과 정여사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다가 수사 결과 폭발의 원인이 전기누전으로 밝혀지고 나서는 이유 없이 고인을 욕 한 이들의 큰 반성도 없이 서서히 잊히는 모습, 삼촌이 자신의 친누나이자 진희의 엄마인 첫사랑을 추억하며 애통함에 젖는 모습을 포함한 상당히 많은 대목들이 오래 가슴에 남을 듯하다. 표현력과 묘사도 당연히 엄청나다. 문장 자체가 놀랍도록 견고하고, 서정적이면서도 영화적인 장면 묘사 덕분에, 내용과 무관하게 독자가 그 대목을 가슴에 갈무리하게 되는 식이다. 또한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전체적인 완결성이 높고 구조적으로도 완벽하다. 나보다 어리면서 동시에 나보다 성숙한 작품임을 그리고 작품이 어렸을 때부터 이미 성숙해져 있었음을 생각하면, 작품과 진희의 운명이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창의적인 발상도 눈에 띈다. 물론 자전적 작품이라는 특성 탓도 있었겠으나,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눈을 빌려 시간이 만병통치약 인양 구는 인간의 게으름과 어른들의 어리석음을 질타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롭고 통쾌하다. 우리 엄마는 늘 동생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겨우 옹알이하던 남동생이 엄마 다음으로 '인니'를 발음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세 명의 큰 누나들 덕분에, 막둥이는 아빠나 맘마보다 언니를 먼저 발음했다. 그 막둥이는 말을 뗀 후로는 큰누나가 콧잔등에 주름잡으며 웃으면 코끼리라고 부르지를 않나, 아빠가 술을 마시고 귀가해서 뽀뽀하면 안주를 척척 맞추며 코를 움켜쥐지를 않나, 기상천외하다고 느낄 만큼 정확하고 신랄하게 현상을 분석했다. 아이들은 편견 없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수용한다. 그 이후로 애들 눈이 어른 눈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는 외할매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아이들 앞에서는 작은 언행도 더 조심하게 됐다. 본 작의 진희는 물론 또래보다 훨씬, 아니 지금의 나보다 더 성숙한 면모를 가진 올드 걸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성격의 물정(物情) 만큼은 어른보다 훨씬 어두웠기 때문에, 어른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다. 어른의 시선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을 가끔은 아이는 볼 수 있다는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이치를 작품의 환경으로 삽입했다는 점이 내내 감탄을 자아낸다.
 
 
또 흥미로운 점은 <새의 선물>은 아주 짧은 자크 프레베르의 동명의 시에서 출발하고, 이 시의 앵무새라는 모티프를 통해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와 본작 간의 연결점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앵무새 죽이기>의 어린아이의 눈으로 편견과 혐오에 눈이 먼 어른들의 모순적 행태를 고발한다는 점과 앵무새의 상징성에 초점을 두고, 세 작품을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주 늙은 앵무새 한 마리가 /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갖다 주자 / 해는 그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 버렸네 // 앵무새는 '그'에게 해바라기 씨앗을 가져다주고, 그-나는 해석이 분분한 이 시에서 그를, 온 생명의 근원이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 생명을 키워내지는 못하는 '해'로 보았다-는 씨앗을 틔우기 위해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간다. 해는 존재만으로 씨앗에서 새싹이 움트게 하지 못한다. 생명이 자라기 적당한 외부환경이라는 전제만 갖춰진다면, 씨앗이 꽃피우고 열매 맺는 것은 온전히 씨앗의 몫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만, 태양이 뜬다고 해서 내일이 오늘보다 저절로 나은 날이 될 수는 없다. 새는 선물한다. 세상의 모든 올드보이들에게. 희망과 희망의 무력함을. 해바라기 씨앗을. 제 발로 다시 어린 시절의 감옥으로 돌아간 올드보이들과 올드걸들 중에 같은 씨앗 안에 숨은 붕괴를 싹 틔울 자는 얼마나 될까. 탐스럽게 입을 열고 해바라기를 하는 나무에서 단단한 갈색으로 여문 사랑을 따고, 깨어지고 무너지는 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자는 얼마나 될까.
 
 
어느 점심에 회사 동료 C와 다슬기탕을 먹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운을 뗐다. 5. 18이 벌써 40년이나 된 이야기인데 너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우리가 과거에서 발전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광주가 발전을 못하는 것 같아. 삽시간에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누군가에게는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5. 18은 현재의 문제야. 정치적으로 이 이야기를 오남용 하는 사람들이 문제지, 과거는 잊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거야. 발전이 그렇게 중요해? 그 발전은 오래가지 못할 거야. 과거를 잊고 없었던 일처럼 굴며 땅을 닦고 세우면, 마트도, 공장도, 백화점도, 아파트도, 땅속으로 꺼지는 거야. C는 아랑곳 않고 4. 3 사건을 운운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 제주도민들은 더 큰 규모의 피해도 잊고 사는데... 다슬기탕을 말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는 '올드' 보이인가. 올드 '보이'인가. 아니 그냥 다슬기 같은 놈일지도 모른다. 퍽퍽 말없이 다슬기를 퍼먹다 보니 C는 어느새 입을 다물고 뚝배기에 고개를 처박고 있다. 시간이 흘렀다 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변한다 해도 그것이 타인이 이끄는 잘못된 방향의 변화라면 우리는 그 방향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언젠가 이해할 수 있을까. 때로는 비극을 잊지 않는 것으로 시간에 맞서 투쟁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구인지 대답하는 데에는 흘러간 시간을 잊지 않는 것이 필요했다고 무릎 치며 되새길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른다고 씨앗이 저절로 사랑으로 싹트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까. 어린 시절 감옥에서 나가는 방법은 그 긴 감옥을 오롯이 걸어내는 수밖에 없다. 해바라기 씨앗을 키워 사랑으로 꽃 피울 방법은, 나는 누구이고 나는 내 삶과 오늘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하여 대답할 방법은, 지난 시절의 감옥을 통과하는 방법뿐이다.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알을 깨고 씨앗의 껍질을 찢어 날아가고, 새싹을 움 틔워야 한다.
 
 
나는 자문한다. 앵무새가 가져다준 씨앗을 받고도, 그 씨앗 안에서 무엇이 움틀지 두려워하는 늙은 소녀가 되어본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아도 되는 아이가 되어서도, 이대로 게으를 것인지,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상상한다. 우진이 아니라 진희가 되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답하기 위해, 앵무새가 물어다 준 해바라기 씨앗이 움터 사랑으로 꽃 피우게 하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 감옥을 걸었던 그 작가들처럼 되겠다고 대답한다. 삶은 여전히 농담이고 모순이지만, 나는 삶이 부리는 재주를 구경하는 구경꾼이 아니다. 잿빛 일상이 눈앞을 가득 메워 시야가 흐려져도, 똑바로 볼 것이다. 해준처럼 각막에 인공 눈물을 떨어트려 깜빡일 것이다. 비극을 안고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나의 삶의 주인은 나 하나고, 타의가 내 세계를 세차게 뒤흔들어도,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새의 선물을 싹 틔울 것이다. 앵무새는 소밭에서 뭘 따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으며 사람을 위해 마음을 열고 노래를 부른다. 씨앗을 물고 온 그 늙은 앵무새에게 겨눈 총구 앞을 막아설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비극도 잊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늙어버린 소년이, 씨앗을 받은 '그'가 그러하였듯 자신의 어린 시절 감옥으로 들어가기를, 그래서 무사히 빠져나오기를. 삶은 시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의미는 시간이 지난다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마땅히 잊어야 할 만큼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를. 삶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고, 의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견고해지는 것이며, 시간은 의미를 품고 우리 안에 쌓이는 것임을 배우기를. 늙어버린 소년이여. 앵무새의 선물에서는 붕괴와 사랑이 꽃 핀다.


* 2022. 11. 29.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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