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것들의 위대함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이 키건, 2021
[이처럼 사소한 것들 - 클레이키건] 사소한 것들의 위대함
순리는 보통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을 때 그 죄책을 묻는다. 법(法)은 이치를 따라 물(氵) 흐르듯(갈 거 去)이 흘러야 마땅한 일들이 그러지 못했을 때 가하는 공적 제재에 대하여 기술한다. 특히 형법은 절도, 손괴, 사기, 폭행, 명예훼손, 모욕, 상해, 살인처럼 타인의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 명예나 신체에 대한 부정적 상호작용을 정의하고, 그 행위에 져야 마땅한 책임을 규정한다. 하지 않는 것이 순리에 맞는 이러한 행위는 해서는 안된다는 측면에서 넓은 의미의 부작위의무(不作爲義務)에 포함된다. 한편 형법은 작위의무(作爲義務)를 규정하여 법령, 법률행위, 선행행위, 기타 신의성실의 원칙, 사회상규 혹은 조리상 작위의무가 기대되는 경우에 작위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도 제재한다. 예컨대 술집 주인은 자신의 손님이 겨울철 주취 상태로 가게 내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할 경우, 최소한 그가 동사하지 않도록 조치해야 할 의무를 진다. 고등학생들과 관광객들이 가득한 배가 가라앉고 있는 경우, 선장은 배에 탑승한 승객들이 구조될 수 있도록 최적의 대피 방안을 안내 및 최소한의 구호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를 진다.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행위로 옮겨야 마땅한 작위의무를 행하지 않는 사례가 있다. 갑질을 견디던 경비원이 노구를 죽음에 부치기도 하고, 우리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학교에서도 부당한 대우를 받던 선생님, 학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거리로 나왔던 아까운 목숨들이 오랜 세월 어른들이 외면했던 구조적 문제 때문에 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자들이 작위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 정의를 외면하고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 때문에, 그들의 떠남이 바래지기도 했다. 우주라는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인간은 티끌에 지나지 않는 존재고, 인간의 몸짓은 우주에 쌓이는 수많은 찰나 중에 하나일 뿐이지만, 인간의 삶이 무위(無爲)에 가깝다고 해서 의무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법은 권리 위에 잠자는 자의 권리를 저절로 보장해주지 않고, 도리는 의무 앞에서 눈감는 자의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선은 쉬이 버릇으로 남지 않고, 악은 인간의 나약한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법적으로 명백하게 부담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인간이라면 져야 마땅할 의무를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인간은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피하고 눈감을 때 가장 나약하다. 그 순간 그의 한계가 적나라하게 세상에 맨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오늘은 한 달 만에 J를 만나고 왔다. 막냇동생 J의 훈련소 수료식 날이었다. 안으면 깨어질 것 같고 깨물면 입안에서 녹아버릴 것 같았던 아기는 자라,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자신의 정의를 공표할 줄 아는 소년이 되었고, 담담한 얼굴로 분단국가의 비극을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청년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J는 뭐랄까, 다름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아이였다. 생계를 농업에 기대는 작은 산간 지역 특성상, 혼인 적령기를 놓친 남성들은 낮은 혼인 성사율과 출생률의 해소 방안을 국제결혼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이미 막둥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친구들 중에 다문화 가정 출신의 아이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어른들의 폭력적 언행은 전염력이 심해서 아이들은 쉬이 전염되었고, 천진난만한 얼굴들 사이에서 소수에 해당하는 천진난만함은 다르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었다. 막둥이는 그런 다름들에게 출신과 상관없이 가장 친한 친구를 자처하는 유형의 친구였다. J는 그런 거 안창피해? 엄마가 다른 나라 사람인 애들이랑 사진 찍고 같이 놀러 다니는 것. 그럼 친구들이 놀리지 않아? J는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되물었다. 그게 왜 부끄러워? 그냥 다 같은 친구들일 뿐이야. 날 놀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쁜 거야. 그날 나는 너무 창피했다. 부끄러웠다. 맞아. 혹시 J까지 괴롭힘 당할까 봐 그랬어. 괴롭히면 힘들겠지만 그건 나쁜 거잖아. 나는 아직도 그날의 어린 J의 눈을 생각하면, 치미는 울음 속에서 무기력하게 길을 잃는다. 다른 것은 인정받거나 이해받는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채로 그저 존재할 뿐이라는 나의 믿음은 그때 시작되었다.
한 달 만에 J는 꽤 멋진 어른이 되어 있었다. 부대의 안내에 따라 가족들이 연병장에 서있는 훈련병들에게 계급장을 달아주기 위해 일어났다. 다가가는 걸음마다 나는 이미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J는 계급장이 가슴팍에 달리고 큰 소리로 관등성명하는 순간까지 부동자세로 일관했다. 엄마와 누나들이 J를 껴안고 울어도 J는 의젓하게 눈물을 참아냈다. 수료식이 마무리되고 J에게는 가족들과 5시간의 외출이 허락되었다. 행사 전에 중대장님이 그간의 훈련을 요약해 주실 때, 그날 훈련을 수료하는 100여 명의 훈련병 중에서 1명의 훈련병만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홀로라고 했다. 그 한 명은 어떻게 해? 너무 안 됐다. 외로울 것 같아. 우리가 밥이라도 같이 사줄까? 아는 친구야? 아니 모르는데,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 소대장님들이 밥도 사주고 같이 영화도 본댔어.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데, 혹시라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는 마. 아무도 안 올 수도 있는 거지.
제법 어른 티가 나는 J는 여전히 유치원 시절의 그처럼 편견이 없었다. 밴드에 사진 보니까 사진 맨 앞에 있는 사람들 너무 무섭더라. 문신도 많고, 인상이 너무 무서워. 나이도 많지? 나이는 많은데, 문신이 많다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잖아. 나 그 형이랑 제일 친해. 분위기 메이커야, 정말 재밌는 사람이야. 연륜이 있어서 뭐든 잘하고, 또 우리도 잘 알려줘서 좋아. 좋은 사람이야. 걱정이 많겠지만, 사진만 보고 오해하지 마. 아직도 우리 집에는 J가 유치원에 다니던 때에 그가 다른 그대로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던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걸려있다. 그 사진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일상적 정의 구현의 이미지, 즉 구조적 부조리가 개인의 비극으로 구체화하고, 공동체의 느슨한 연대가 그것에 저항하는 모습을 대표한다. 청년이 된 그는 여전히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편견으로 대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하는 데에 어떤 거리낌도 없다. 소수에 해당하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거나 그들이 내미는 손을 마주 잡는 데에 어떤 망설임도 없다. 다름이라는 개념에서 격차를 감지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남들과 다른 삶, 그러니까 혼자 늙어가는 삶을 감당하기 싫다는 이유로 대가를 지불하고 타국의 여성과 이행한 결합은, 다수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태어난 소수의 아이들의 비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비극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소수의 아이들이 차별의 일반화와 만연화 저지를 위하여 최전선에 섰다. J는 자신이 인간으로서 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도덕적 의무, 현실의 부조리에 행동으로 대응하는 작위의무를 행동으로 옮겼다. 인간으로서 보장이 당연한 것을 보장하고 보장받기 위하여 결연해져야 하는 살풍경은 침입자들이 원주민을 대상으로 심리적, 물리적인 젠트리피케이션 정책을 가했던 시대상을 그린 <플라워 킬링 문>, <밤의 경비원>, 유색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그린 <포레스트 검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 같이 인간으로서 인간이 부조리 앞에서 취해야 할 작위 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작품들이다. 2022년 부커 인터내셔널 후보작에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들이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국내에서는 덜 주목받았으나, 역대 후보작들 중 가장 짧은 분량으로도 극찬을 받았던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역시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 외면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작위 의무를 서정적인 필치로 전개한다.
1985년 펄롱은 석탄을 배달하는 사업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 가장이다. 펄롱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새벽,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석탄광에서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상태로 갇혀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최근에 출산했다는 그 소녀를 수녀들 손에 다시 맡기고 미사를 갔던 순간 이후로 그는 심경에 복잡한 변화를 맞는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못해 속옷이 흥건히 젖은 소녀를 두고, 소녀가 부탁했던 단 한 가지의 부탁, 아이가 잘 있는지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로 미사를 갔다는 사실에 그는 인간적인 죄책감을 느끼며, 그날의 행동이 위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인간으로서 이행해야 할 의무를 외면했다는 자각, 수녀원이 선을 넘었다는 의식, 자신이 남들은 쉬쉬하거나 무관심해서 보지 못한 것을 인지하고도 자신의 안위 때문에 모른척하고 있다는 무의식적 직감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는 선과 악, 작위의무의 이행과 그 위반의 경계 위에 놓인다. 수녀원은 두 딸의 학업, 자신의 생업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기관이고, 지역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이며, 대부분의 이웃들이 수녀원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따르거나, 수녀원의 어두운 면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한다. 문제에 눈감고 침묵하는 것은 운신(運身)에 이롭고, 방법론적으로도 수월하다. 반면 배달을 갔을 때 보았던 파리한 인상의 소녀들과 작은 아이들, 강에 빠져 죽고 싶으니 자신이 수녀원에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던 소녀, 석탄광에서 봤던 초췌한 소녀 세라를 못 본척하는 것은, 인간적인 도리를 외면하는 것과 다름없다. 수녀원으로 표현되는 거악, 혹은 규모는 작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틀림없는 악(惡)과 맞서는 것은 펄롱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패배 혹은 상처뿐인 영광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펄롱은 망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펄롱은 크리스마스에 석탄광을 찾아가 그날마저도 창고에 갇혀 있는 세라를 발견하고 데리고 나온다. 펄롱은 세라를 데리고 집으로 향하면서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불의 앞에 용기 내지 않고도 자신이 당당히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더 옛날이었다면, 자신이 구하고 있는 세라가 자신의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으니 앞으로 어떻게든 해나가리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로 보일 수도 있는 이 믿음은 실은, 당장 뾰족한 대책이 없더라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조건 없이 받을 수 있었던 사랑과 보살핌의 힘을 그 힘이 필요한 작은 존재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의지와 다짐을 의미한다. 그는 며칠간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본 아이들을 생각하고, 동시에 펄롱 모자를 거둬 보호하고 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줬던 윌슨 여사와 이제야 생각하니 자신의 친부일지도 모를 네드 아저씨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윌슨 여사가 그러하였듯이, 자신에게 네드 아저씨가 그러하였듯이, 세라에게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세라의 아이에게 자신이 윌슨 여사이자 네드 아저씨가 되어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본작은 짧은 분량으로도 펄롱과 피해자들의 복잡한 심경과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고스란히, 그러나 평범한 삶을 묘사하는 방식으로 은유적으로 전달한다. 예컨대 성실한 펄롱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출근하기 싫어한다던지, 수녀원장과 대화할 때 “누구나 어딘가에서 태어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요.”(p.81)라고 말한다던지, 벽이 사방에서 자신을 조여드는 것만 같아서 도망가고 싶어 한다던지 하는, 평범한 일상의 신경질적인 균열이 펄롱에게 남아 있는 심리적 부채감과 그가 강렬하게 의식하는 도덕적 의무를 상징한다. 강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무빙>에서 장희수는 같은 학급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폭력 행위와 강탈 행위를, 얼마 남지 않은 고3 생활의 안위와 자신만을 위해 쉼 없이 일하는 아버지와의 평화로운 삶을 위하여 애써 외면한다. 그러나 학우들과 학교 측의 묵인 속에서 폭력의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달았음을 느낀다. 작품은 그 과정을 희수가 공부하는 책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축약한다.
희수가 보고 있는 교과서가 가해자의 남자친구에 의해서 찢기는 순간 희수의 작위의무에 대한 인식이 뚜렷해지고, 문제상황에 개입할 것을 본격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교실 안에서 극심한 린치가 이어지고 있을 때, 그녀가 평소처럼 주황색 형광펜으로 교과서의 중요 부분을 하이라이트 하다가, 책의 여백을 지나 책상까지 ‘선’을 넘어 형광펜이 주황색으로 그어지는 장면을 통해, 그녀가 이 상황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었다고 인식했음이 은유적으로 묘사된다. 희수는 주황색을 빨간색(붉을 주 朱)과 노란색(누를 황 黃)이 섞여 있는 이도 저도 아닌 색깔이라고 생각하지만, 훗날 봉석은 그녀에게 주황색이야말로 어떤 색깔도 될 수 있는 경계 위에 있는 색이라고 이야기해 준다. 경계인간이었던 그녀는 그 일로 모두가 경계 위에 서있는 인간이고, 자신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다른 이가 발 끝으로 위태롭게 서있는 경계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폭력에 대항한다는 작위의무를 이행함과 동시에 신체적 능력의 각성을 겪는다. 펄롱이 행동하기까지의 과정은 희수가 자신의 인간적 의무를 자각하고 이행하기까지의 과정과 유사하며, 스스로 요동치는 경계를 평범한 일상에 희미한 균열이 생기는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이 표현론적으로도 상당한 유사성을 띤다. 은유가 많기 때문에 여러 번 감상할수록 발견할 수 있는 의미가 많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구조적으로 강력하게 읽히며, 심미적인 감상 경험이 더 깊어진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효용론적 관점에서도 유사점이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제임스 조이스, 모파상, 디킨스, 롤링의 작품을 떠올렸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장재현 감독의 <사바하>를 떠올리게 됐다. 크라스마스는 아기예수가 태어난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헤롯왕이 아기예수의 탄생을 막기 위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모든 남아들을 죽인 희생의 날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들을 이 땅에 보냈지만, 사랑하는 아들은 20여 년 뒤, 이번에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겪는다. 크리스마스는 희생을 의미한다. 희생으로서 지키고자 했던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에 융합, 공존을 의미한다. 금화의 가족이 그것의 흉측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가족의 일원으로 품어주었다면, 그 다름과 공존하기로 결정하였다면, 네충텐파는 미래를 내다보고 그것이 김제석(유지태 분)의 불멸을 끊어낼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제석은 자신이 살기 위해 양자들을 살인병기로 키워내는 괴물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목사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하고 하늘에 독백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본작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사바하>가 다른 것들에 손을 내밀어 공존하는 삶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공존에서 더 나아가 인간이 공존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작위의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본작은 인간이 사소하다고 생각해서 보지 않았던 것들 혹은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것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마음으로 감싸 안아야 함을, 그리고 모두가 외면하는 것을 감싸안는 힘은 사랑에서 기인함을 묵직한 메타포에 꾹꾹 눌러 담은 작품이다. <1984>의 연희는 이한열 열사에게 눈물로 묻는다.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지냐고. 세상은 작은 행동으로 쉬이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펄롱들의 크리스마스가 없었다면, 막달레나 세탁소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J들이 피부색이 다른 아이와 나란히 사진 찍지 않았다면, 다문화 출신 가정 아이는 늘 혼자 사진을 찍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J가, 희수가, 이한열이 펄롱이었다면, 그 오래 흔들리고, 오래 힘들어하고, 오래 고민하고, 가족들을 바라보며 한숨 쉬다가도. 크리스마스 오후, 구두를 찾고, 세라를 구하러 수녀원으로 걸었을 것이다.
사소한 것들이 세상을 바꾼다.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만큼 따스한 위로가 없었던 것 같다. 이런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용기들이 세월을 따라 퇴적되어 세상을 바꾼다. 사소한 것들이 세상을 바꾼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해서, 당연한 만큼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도리들, 의무들이. 사소한 것들이 세상을 바꾼다. 사소해서 보지 못하고, 사소해서 애써 모른 척했던 것들이. 그리하여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더 이상 사소한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은 그렇게 위대한 것이 된다. 이처럼 사소한 사람들이,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사소한 나날들을 채우면서도. 사소한 삶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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