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랜드 - 천선란] knowland
엄마와 아빠는 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이미 꽤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러나 두 분은 내 종교관에 전혀 간섭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하루를 마칠 때 시편과 잠언을 한편씩 읽어주셨고, 수요일에 조용한 교회 예배에 가보는 것도, 성당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것도, 내 결정을 존중해 주셨다. 각 종교의 경전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비슷한 방식으로 기도를 올리고 있으며, 따라서 정말 신이 있다면 -엄마 입장에서 신은 존재하고 그분은 부처지만, 나에게 그 점을 강조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분께서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이 가장 편안해지는 장소에서 신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평화로이 자신의 소망을 들여다보는 것에 대하여 노여워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종교적으로 오랜 시간 넓은 범위를 탐구하고 배회하던 나는 결국 불교에 정착했다. 말이 정착이지 신앙이 깊어지지는 않았지만, 산 중턱에 놓인 작은 절, 좁은 경내에 넓게 울려 퍼지는 풍경 소리와 목탁 소리, 절 앞에 흐르는 작은 개울 앞에 소망으로 올려 쌓인 돌탑들, 부처를 믿지 않는 자에게도 문을 열어 산채비빔밥을 한 그릇씩 나눠주는 넉넉한 인심, 마음에 미움이 가득해질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염주를 한 알씩 세어 보라는 주지스님의 말씀 같은 것들이 절에 앉아 있는 나를 평화롭게 했다. 양 팔꿈치와 무릎, 그리고 이마까지 신체의 다섯 부분을 땅에 대어 절한다고 하여 오체투지(다섯 오 五, 몸 체 體, 던질 투投, 땅 지 地)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108배를 하고 법당을 나서면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마는 부처께서는, 보잘것없어 보여서 법당 한구석에 수줍게 올려놓은 과일 한 알도, 너른 마음으로 찬찬히 굽어보신다고 했다. 혼자 세상에 나와 신앙도 돈으로 일군다는 냉엄한 현실을 배우고 나서도, 조계사 주차장에 가득한 외제차를 지나쳐 법당 앞으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말씀 덕분이었다. 성균관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오면 조계사를 늘 지나갔는데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면 절 앞에 내려 경내로 들어갔다. 만 원을 시주함에 넣으면서 늘 부처께서 내가 과외로 벌어서 내놓은 작은 돈도 외제차에 실려 오는 큰 액수의 시주만큼이나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심을 느꼈다. 때로는 진실보다 믿음이 중요하다. 때로는 진실보다 절망이 더 파괴적이다.
심정적으로 불교와 더 가까워서인지, 아이들을 사랑해서인지, 다른 사연들보다 동자스님들의 사연에 유독 더 따뜻함을 느끼고, 또 가슴 아파한다. 방금 일어난 귀여운 일이라며 커뮤니티에 업로드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글이 있다. 화자는 카페 직원이다. 스님과 동자스님이 들어와서 아이스초코를 시켰는데, 주문이 밀려서 늦어지자 동자스님이 울상으로 "우리 건 왜 안 나와요 8ㅁ8" 하고 화자에게 물어보신다. 화자가 이에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지요 스님" 하고 대답했는데, 동자스님께서 헙! 하고 놀라더니, 스님께 돌아가서 누나한테 부처님이 계시다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20대 중반쯤에 이 글을 읽고 오래 울었었다. 부처께서 작은 기도와 보잘것없는 불공도 굽어살피시지만 그것을 무조건 성취해 주시지 않는 이유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인간은 자신의 카르마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결코 자신이 쌓아 온 공덕(공 공 功, 덕 덕 德)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밟아 온 시간과 기울여 온 노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순리기 때문이다. 동자스님은 그를 배우고 이해하여 순서를 기다리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모든 존재가 성불할 수 있고 깨달음에 가닿을 수 있으며 따라서 부처가 깃들 수 있음을 이해하여 화자에게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녀린 인간이, 어린 동자스님이, 때로 부당하다 여겨질 만큼 가혹한 순리(순할 순 順, 다스릴 리 理) 앞에서, 까마득한 과거를 되짚으며 자신의 카르마를 헤아리고, 만트라로 자신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독이며 오늘을 사는 것이 늘 눈물겹다. 이대로 살지 아니할 수 없다고 디딘 땅을 내치지 않는 것이 대단하다. 대견하고 아름답다. 천선란의 SF 소설 단편집 <노랜드>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10편의 단편 소설에 담아 이야기한다. <흰 밤과 푸른 달>을 통해 전하지 못한 말을 남긴 채 영영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이 얼마나 후회로 무거워지는 일인지,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를 통해 영영 사라지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삶의 무게를 짊어졌어야 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돌아오는 길을 떠난 것들도, 돌아오지 못할 것을 떠나보내는 존재들도, 그 간극 때문에 고통받는 것은 매한가지다. 인간은 떠나야 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비극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을 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멈출 수 없다. 그 비극을 견뎌야 하고, 하늘로 자라는 뿌리로 단단히 하늘을 움켜쥐고, 땅으로 자라는 가지로 부단히 짊어져야 한다.
특히 수록작 <우주를 날아가는 새>는 동자스님들과 그들을 마음으로 낳고 키운 노스님의 이야기를 담아, 인류가 그동안 쌓아 온 부실 공덕(不實功德)에 의하여 파멸 앞에 설지라도, 인간은 삶은 포기해서는 안 되고 결코 포기할 수 없으며, 그로써 자신의 카르마를 끝까지 책임져야 함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가까운 미래, 지구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멸망을 앞두고 있다. 인류는 차례로 아포칼립스를 탈출하고 도량의 식구들도 모두 마지막 구조선에 오르지만,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노승 효종 스님과 효종 스님이 키운 효원은 절에 남는다. 효원은 자신을 키워 준 노승이 혼자 멸망의 끝에 남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한 우주는 성주괴공(이룰 성 成, 불교에서 시간관을 나타내는 겁 劫, 살 주 住劫, 무너질 괴 壞劫, 빌 공 空劫의 줄임말)을 반복하고 모든 것이 변화하는 제행무상(모두 제 諸, 다닐 행 行, 없을 무 無, 항상 상 常)인데 티끌만큼 짧은 인생에 내일을 바란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며 따라서 욕심나지 않는다고 차분하게 말한다. 인간의 삶은 무상하다. 무상에는 분별이 없다. 효원은 효종 스님과의 마지막을 평소처럼 보낸다. 모든 이가 떠나 경내가 텅 빈 밤, 효원은 법당에서 기척을 느껴 싸리비를 들고 법당에 갔다가 멸종했다고 알려진 저어새를 본다. 그리고 그 저어새가 예전에 효종 스님이 목숨을 구해주고 치료해 준 바로 그 새라는 것을 직감한다. 효원은 저어새에게 "왜 떠나지 않으셨습니까. 후회하지는 않으십니까." 물었다가 부끄러움을 느낀다. 깜빡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해는 중천에 떠있다. 저어새는 떠나고 없다. 새벽 예불도 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부랴부랴 스님의 처소로 향한다. 그러나 스님에게는 기척이 없다. 효원은 차가워진 스님에게 절을 올리고, 스님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스님이 편히 걸음 하시기를 빈다. 그 순간 멀리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고, 구조기에서 손에 염주 목걸이를 든 군인들이 내린다.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이 구조기에 오르고 싶었음을. 그래서 이토록 울렁거린다는 것을. 군인은 말한다. 스님이 효원을 꼭 데려가달라고 부탁하며 꼭 한 번만 다시 와달라고 했는데, 새벽에 새 한 마리가 염주 목걸이를 물고 오기에 맘에 걸려 다시 왔다고 한다. 효종 스님의 진실 공덕(眞實功德)은 그녀를 삶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숙명으로 이끈다. 그토록 다정하시던 스님께서 인사도 하지 않고 그리 급하게 어디로 가셨는지. 그녀는 눈물로 깨닫는다. 헬기에서 그녀는 붕괴하는 지구를 가득 채운 흙먼지 사이를 날아가는 새 떼를 본다.
요즘의 한국 SF 문학, 특히 천선란 작가님, 김초엽 작가님처럼 젊은 작가님들이 구사하는 SF 문학은, 공상과학을 주제로 한다기보다는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작품의 환경으로 삼고, 인간이 오랫동안 탐구해 왔던 화두를 주제로 지극히 고전적인 문학의 면모를 선보이고 있다. 특히 <천 개의 파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과 같은 작품들은 근 미래를 시대적 배경으로, 일반인이 과학적 지식 없이도 인과관계에 대한 인지만으로 공상과학적 환경을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하고,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을 주제로 한다. 과학적 전문 지식이 전무한 독자 입장에서 SF 문학의 정의가 계보에 따라 이런 변곡을 맞은 것이 반갑다. 흥미로운 현대의 환경과 인간의 오래된 고민이 조화롭게 섞여드는 것이 계속해서 SF 문학을 찾게 만들고 있다. 물론 과학적 지식을 갖추면 더 재밌을 구석이 있겠지만, 개연성에서 자유롭게, 오 그런 환경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도 충분히 작품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결국 SF 문학으로의 유입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본 단편소설집 표제 '노랜드'는 <두 세계>에 등장하는 출판사의 이름이다. 노랜드는 소설 기반의 가상현실 프로그램으로 책을 오감을 동원하여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하여 출간한다. 작품은 노랜드에서 출간한 소설 안에 갇혀 바깥세상으로 나가기를 갈망하는 AI 아락스와 지구에 불시착한 존재처럼 스스로 겉도는 삶을 선택하고 다른 세계로 가기를 열망하는 인간들을 조명한다. 우주적 존재인 셀레스티얼의 잘린 머리에 은하계의 범죄자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행성 노웨어(knowhere)처럼, 노랜드는 자신과 불합치하는 땅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원하고 꿈꾸고 그리하여 발붙이길 원하는 땅을 표상한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 보려는 상대의 애쓰는 몸짓도 폭력이 된다. 그저 서로가 다른 상태로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거나 특별한 이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상태로 존재하는 곳. 어디에도 없고 실재하지 않으나, 알고자 하고 실현하고자 한다면, 경계를 넘어 현실로 훌쩍 뛰어넘어 들어올 수 있는 세계의 바깥, 밖의 세계, 그것이 노랜드다. 불교에서는 수행으로 진리를 깨달아 모든 번뇌에서 해탈하는 최고의 경지를 열반(개흙 열 涅, 쟁반 반 槃)이라 부른다. 진리(眞理)는 거창한 명제가 아니라 어떤 존재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실을 일컬으며, 그 깨달음으로 이루어진 세계가 노랜드다. 노랜드를 운영하는 관계자들마저 AI가 인간의 인지를 장악할 수 있게 된 경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독자 또한 마찬가지지만, 작품이 주목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어떻게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과학으로도 해결 불가능한 일들을 해결하고 깨달아가느냐다. <두 세계> 뿐 아니라 단편집에 실린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인간이 자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noland를 knowland로 실재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고, 진리를 깨닫는 지난한 과정을 견뎌내는 것이 진리를 체득한다는 결과를 낳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계이며, 나와 다른 존재를 인지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본능을 뛰어넘어 그저 다른 채로 함께한다는 진정한 의미의 공존을 이룩하기 위해 인간이 하는 몸짓이 사실은 무상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그간의 실수를 딛고 우리 삶을 평화로 이끌고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카페 직원에게서 부처님을 보고, 누나에게 부처님이 계시다며 눈을 휘둥그레 떴던 동자스님께서는 아직 수행의 길을 걷고 계실까. 스님께서 절 밖에서 순수가 부러지고 있다는 것을 영영 모르실 수는 없다. 진실 공덕보다 부실 공덕이 더 자연스럽고, 중요하게 다뤄지는 속세의 일에서 영원히 자유로우실리 없다. 그렇다 하여 어린 스님을 데리고 수행하시는 노승께서 스님이 바깥세상으로 자라는 자연스러운 일을 막을 수도 없다. 자식이 오늘을 사는 것을 막을 부모가 없듯이. 효종 스님이 효원의 사 겁의 흐름을 흐르지 못하도록 괴고 있을 수 없듯이. 효원의 앞에 펼쳐질 오늘들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그리하여 인사도 없이 급히 멀리 가셨듯이. 동자스님께서 어떤 길을 선택하여 어떤 땅을 디디고 계시든 아이스초코를 시켜드시던 그날의 깨달음처럼, 당신의 숙명을 위해서 모든 일들이 지키는 순서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충실한 오늘을 쌓아 올리고 계시길 빈다. 그리하여 knowland에 닿으시길 바란다. 108배를 하고, 탑돌이를 하고, 밤마다 반야심경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쓰면서, 나 또한 오늘이 모여 만들어질 선택적 숙명을 차근히 다듬어갈 것이다.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에서 벤은 죽음을 다짐한 사람들이 더 오래 사는 이유는 살아야겠다는 본능적 욕망이 뒤틀어지면 지구의 흐름으로부터 빗겨나가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모든 일들은 순리를 따른다. 사소하지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보편적인 사실들, 예컨대 '쓰레기를 바다에 버리면 안 된다.',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명제들이 모여 진리를 이룬다. 이 진리들을 따르지 않는 것이 지구의 흐름을 비튼다. <푸른 점>의 주인공 시에라는 푸른 점이었다가, 인간의 욕심으로 잿빛으로 산산조각 나버린 행성을 향해 경례를 하면서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했던 세상 모든 존재들이 있었던 그 작고 푸른 점이 바스러져버렸음을, 그리하여 그 모든 존재들도 흩어져 버렸음을, 대원들에게 영영 알리지 않겠다고. 세상에는 알려져서는 안 되는 진실도 있다. 가끔은 진실보다 믿음이 더 중요하니까. 때로는 우리가 믿는 것만이 답이니까. 세상에는 어겨서는 안 되는 진리도 있다. 진리의 굴곡은 순리를 비트니까. 때로는 진실이라 하여 그것이 진리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도리다. 믿음으로 오늘을 계속할 수만 있다면, 순리에 따라 오늘들을 살아낼 수만 있다면, 그 끝이 아무리 무상하더라도 우리 삶은 의미 있다. 시지프스의 무거운 어깨에 맺힌 굳은살은 아름답다. 아무것도 살지 못하는 곳으로 나는 새처럼.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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