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녘 연필소리 Oct 27. 2024

나의 대성당

<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2023

[신을 죽인 여자들 -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나의 대성당


법적으로 책임(꾸짖을, 빚 책 責, 맡길 임 任)은 징벌 내지는 징벌의 성격을 띠는 조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민사적으로 유책이 확인되는 소송당사자는 행위에 따른 조치, 예컨대 소송비용이나 위자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책임이 있었으나(있을 유 有, 꾸짖을 책 責)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후조치를 받는다. 형사적으로 작위 혹은 부작위의무를 위반하고 타인의 생명, 신체, 재산 등에 위해를 가한 자는 형사처벌을 받고 피해보상을 위한 각종 명령이 선고에 부착된다. 그러나 법적으로 책임과 징벌이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마땅히 그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행위 즉시, 모든 타임라인 위에서 불변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즉 책임은 추완(따를 추 追, 완전할 완 完) 등 사후 보완 행위로 그 흠결을 보정할 수 없는 성격을 띤다. 우리의 법률 시스템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행위에 여러 번의 제재를 가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공적 제재가 소급하여 과거 행위자의 책임을 면하여주는 것이 아니다.


책임은 도의적, 사적 영역으로 확장하였을 때 행위에 대한 가치판단에 있어 훨씬 냉정한 척도로 기능한다. 비질란테와 같은 자경단의 존재를 배제하면, 도의적 영역에서의 유책행위에 대한 사적제재는 책임에 위배한 행위로 인한 피해자의 원망, 행위자의 죄책감, 괴로움, 인간으로서의 패배감, 수치심 등 훨씬 내밀하고 개인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아무리 나름의 방식으로 괴로움을 견디며 참회하였더라도 그 제재가 적정하다고 합의된 기준을 따르지 않으므로 합당한 것으로 보기 어려울뿐더러 시스템적으로 일사부재리, 시효 등 그들이 진정한 속죄 후에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을만한 지형적 기능도 전무하다. 역으로 때문에 사회 구성원은 서로를 향해 도의적 책임을 더 자주, 더 엄격하게 물어야 한다.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 따르는 예상되는 제재가 없을수록 자기 자신에게 관대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법률 시스템이 인간의 완전한 교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하여 회의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지도 않는다.


안타깝게도 시스템이 제재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도의적, 사적 영역에서의 책임 없는 행위 역시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정신, 영혼, 생명, 신체, 재산 등에 위해를 가한다. 물론 <브로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제시하였듯이 가족의 의미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혼인관계와 혈육관계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보통 아이를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피임을 하지 않고 벌이는 성행위가 양 당사자가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이어지는 경우, 죄 없는 아기들이 태어나지도 못하고 숨을 거두거나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등 잔인한 상황에 내던져진다. <그로운>을 읽으며 독자들도 함께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것처럼,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상대를 심리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일약 가스라이팅 행위는 피해자에게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박탈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타인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두고 조종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상황을 조작하는 후버링과 같은 행위는, 타인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그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극단적으로 축소하기도 한다. <신을 죽인 여자들(대성당)>은 이처럼 끔찍한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안일하게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나 소시오패스가 벌일 법한 드문 일이라고 단정 짓고 타자화하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설사 자신과 하등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에게는 이런 위험에 처해 있는 이웃에게 손 내미는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본작은 생활 수준은 높아지고 있으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관계 맺기에 대한 인식 수준은 빠르게 퇴보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이면을, 책임을 가볍게 여기고 인간 자체 보다 인간이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관념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현상에 집중하여 분석하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또한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에 맞춰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강도 높게 경계한다.


본작은 아나와 신학도이자 예비 사제인 훌리안의 성행위에서 시작한다. 아나는 남몰래 성당에서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훌리안을 동경하게 되고, 피정에서 훌리안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갖게 된다. 훌리안은 금기된 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수련을 위해서 남자아이들과 함께 쓰던 방을 떠나 텐트에서 지낸다. 그러나 오랜 기간 이어지는 피정 내내 아나는 계속해서 훌리안의 텐트를 찾아오고, 결국 원치 않는 임신을 한다. 한편 훌리안은 아나와의 성관계를 통해 되려 아나의 언니인 카르멘에 대한 연심을 확신한다. 훌리안은 카르멘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이 모든 상황을 알린다. 카르멘은 아나와의 관계 대신 훌리안과의 사랑을 선택하고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며, 훌리안은 그녀의 지시에 따라 아나가 스스로 낙태를 선택하고 불법 낙태 시술소에서 시술받도록 유도한다. 아나는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마르셀라와 함께 낙태 시술을 받고, 수술이 잘못되어 몸이 아프기 시작하자 성당에서 마르셀라와 함께 훌리안을 기다리다 시술한 지 만 이틀 만에 사망한다. 마르셀라는 도움을 요청하러 가다가 불행히 머리를 크게 다치고, 마르셀라가 쓰러져 있는 동안 훌리안이 아나의 시체를 수습한다. 깨어난 마르셀라는 <메멘토>의 레너드처럼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다. 훌리안은 아나의 시신을 차에 싣고 카르멘을 찾아가고, 둘은 아나의 임신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신을 토막 내 불태우고 유기한다. 광신적인 가톨릭교도였던 아나의 엄마는 아나의 죽음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다시 이야기하지 않지만, 아나의 아빠와 아나의 또 다른 언니 리아는 아나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친다. 아나의 아빠 알프레도는 암으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마르셀라와 법의학자의 도움을 받아 딸의 죽음의 전말을 알아내고, 리아와 손주 마테오에게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전달하는 편지를 쓴다.


본작은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몇 줄로 요약 가능한 이야기를 일관된 방식으로 한꺼번에 풀어내지 않고, 각 장마다 인물들의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진실을 서서히 추격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1인칭 화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철저히 화자 입장에서 해석한 이야기의 조각들이 한 데 모인다. 이에 따라 진실은 서서히 드러나고, 이로써 본작은 몰입도 높은 환경을 조성함과 동시에 장르적으로 스릴러의 색채를 띤다. 독자가 범인이 누구인지, 사건의 전말이 무엇인지, 꽤 이른 시점에 파악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의미하다는 점에서 이 스릴러적 특성이 더 돋보인다. 물론 이런 감각은 스릴 자체 보다 상상하는 것이 제발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 크게 의존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가해자와 피해자들, 유족들의 목소리가 섞이는 과정에서 외려 악의 마음이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악의 마음을 들여다본 독자는 경악하면서도 진실의 추격에 동참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고, 이야기의 관절마다 ‘진정한 어른이었다면’, 혹은 ‘진정한 어른이 있었다면’하고, 이야기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는 방법을 가정하게 된다. 특히 철저히 훌리안과 카르멘의 시점으로 이 추악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부분은, 독자로 하여금 그들이 당시 불과 열일곱 살이었던 아나보다 조금이라도 더 어른이었다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상상을 하게 한다. 본작은 구조적으로 훌리안과 카르멘이 진술하는 이야기를 마지막에 배치하여, 마치 국민참여재판에서 피고인 혹은 피고인 측의 변호인이 최종 변론을 하는 것처럼 구성한다. 그리고 배심원으로 참여한 독자의 분노가 절정에 달하면, 알프레도의 이야기가 사건을 담당하는 기소 검사의 최종 변론처럼 흘러나온다. 격정적인 스릴러를 대상사건으로 하는 국민참여재판이 끝나고, 배심원들은 평의를 앞두고 사건을 돌아본다.


사르다가의 세 자매 중 첫째를 사랑했고 막내와 육체적 관계를 맺었으나 종국에는 첫째와 결혼한 훌리안이, 자신이 벌인 일들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담당신부가 자신의 죄를 사하고 보속 하였다는 이유로 자신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주장하는 부분에서는 차라리 그의 영혼이 불쌍하게 여겨진다. 그는 사건 당시 자신은 아나보다 겨우 몇 살 많았을 뿐이므로 어른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남자였기 때문에 그녀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고도 진술한다. 아나가 먼저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성행위를 하기 위해 그를 유혹했다고 해서 그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어른, 교육자, 그리고 사제로서의 사명감을 육욕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한 것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매일밤 반복적 되는 유혹의 고리를 아나가 만들었고 그가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라고 해서, 그가 피임을 준비할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그가 한 행동에 대한 용서는 담당신부의 몫이 아니다. 그의 보속은 그가 속한 교단의 몫이 아니다.


한 가지 선택지 외에 다른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을 조성하고, 그 선택을 종용한 훌리안과 카르멘 부부는 아나의 선택과 그에 따른 죽음을 방지할 책무에서 자유로운가. 열일곱 살에 불과한 여자 아이에게, 자기 결정권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서 건네는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10대 아이들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존중받아야 마땅하지만, 결정에 따를 수도 있는 결과를 제시하고 무지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자기 결정권의 행사에 따른 책임의 범위를 알고 있는 어른들의 책무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두 가해자가 마땅히 책임져야 하지 않았던 부분은 없다. 카르멘은 피정 중에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아나를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었으며, 훌리안은 유혹을 거절하고 방으로 돌아가거나 콘돔을 준비할 수 있었다. 자신들이 해결할 수 있는 범위 외에 있는 비극적 사건에 대하여 어른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홀로 아픔을 견디고 있는 아나를 위하여 한번 더 침실을 들여다보고, 병원에 데려가달라는 애원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가해자들은 한 번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순간이 없었다.


마지막 변론자인 카르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답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절실하게 기도했다고 진술한다. 그녀는 아나의 그림자가 자신들의 관계를 더럽힌다고 생각한다. 카르멘은 결과론적으로만 이 사건을 분석하면서, 자신의 행복과 훌리안과 낳은 아들 마테오의 탄생을 앞세워 과거를 합리화한다. 훌리안은 이에 동조한다. 그녀는 자신이 믿는 교리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합리적인 것처럼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며 교조적으로 표현한다. 카르멘은 아나가 자신을 질투한 나머지 훌리안을 유혹했다고 생각하고, 아나가 고의로 입힌 상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철저히 카르멘의 입장에서 바라보더라도, 그녀가 사랑과 소명으로 포장했을 뿐 아나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심정적으로 대결하였음을 역설한다. 카르멘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거두시고 그러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 혹은 힘을 달라는 기도를 반복 하자 그 기도는 점점 역겨운 것이 되며, 실수는 인간의 몫이고 용서는 신의 몫이라는 알렉산더 포프의 주장은 산산조각 난다. 신을 죽이는 것은 불신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대전제를 부정하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 맞춘 믿음, 혹은 분별없이 너무 깊은 믿음일지도 모르겠다. 실수로 인하여 다친 사람은 상대가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지도, 용서할 기회조차도 없이, 비참한 모습으로 발견된다. 아무도 카르멘과 훌리안을 의심하지 않자, 카르멘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 대하여 다행(많을 다 多, 다행 행 幸)이라고 표현하며 그저 운이 따랐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황급히 하느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 방조, 사체 훼손, 유기 행위로 이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진정 신의 뜻이라면 이에 대하여 그녀가 다행이라고 표현할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맹목적 자기 확신은 자가당착을 맞는다. 진정 신의 뜻이라면 그녀에게는 그 뜻을 가치판단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녀에게 불리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잔을 뺏기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신의 뜻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로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그 조건에 대하여 불행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웃이 시체 타는 냄새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을 다행이라고 표현했듯이.


진정한 어른을 갈구하던 독자로서는, 리아가 중립적이며 소극적이라고 판단했던 아버지 알프레도가 사실 우리가 찾던 진정한 어른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절정에 이른 분노가 안타까움으로 변환하는 것을 느낀다. 평의를 앞둔 배심원은 지금까지 들었던 피해자의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피고인의 평결과 양형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내놓을지 결정한다. 신의 뜻이라는 합리화 뒤에 숨은 진정한 위선자들 마저도 스스로 위선자라고 생각지 않으나 알프레도는 스스로가 위선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가해자들과는 달리, 자신에게도 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막을 책임이 있었음을 인정함으로써 존엄성을 지킨다.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고 그 즉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여 책임을 다하는 것은, 보속, 속죄, 형벌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위치하며, 알프레도야말로 독자가 찾던 진짜 어른임을 표상한다. 알프레도는 세 딸들에게 진짜 어른이 되어주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도, 독서와 자아탐구를 통해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남으로써 얻게 된 어른의 지혜를 편지를 통해 리아와 마테오에게 전달한다. 알프레도의 영향으로 조금씩 믿을만한 어른이 되어가던 두 사람은, 편지를 길라잡이 삼아 진짜 어른에 도달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대성당을 세운다. 대성당은 인간에 대한 믿음, 타인에 대한 존중과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음, 실존적 자아탐구에서 비롯한 자기 자신만의 신념으로 가득하고, 배려와 사랑에 단단히 기반한 자신만의 성전(성스러울 성 聖, 대궐 전 殿)을 의미한다. 이 성전에는 타인이 체제로서의 종교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선택한 공허한 교리가 아니라, 실존적인 자신만의 논리가 빼곡히 새겨있다. 나아가 대성당을 세운 완전한 어른으로, 동시에 서로를 존중하는 완벽한 타인으로, 이모와 조카는 연대한다. 요컨대 알프레도는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들을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지도했다. 그 또한 그의 책임이었으므로.


본작을 열고 닫는 부녀 리아와 알프레도는 산타 리타를 통해 그들 사이에 놓인 대서양과 2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다. 비극적 사건의 진실을 갈구하고 그 진실에서 타인을 원망하기보다 자신의 책임을 통감했으며 진실과 책임을 유산으로 남긴 알프레도와, 진실과 책임의 후계자인 리아와 마테오는, 산타 리타를 통하여 죽음이라는 실존적 한계를 극복한다. 또한 세상에 아직 남아 있는 수많은 아나들을 위하여 자신의 몫을 해내는 진짜 어른으로 커나가 온 리아와 마테오는 산타 리타를 통해, 서로를 몰랐던 20년의 세월과 그들 사이에 놓인 밀접하지만 혐오스러운 인간들을 뛰어넘어 연대한다. 생전 서로를 처음 보는 조카와 이모는 할아버지이자 아버지의 유해를 산타 리타에 뿌린다. 이로써 그들은 알프레도뿐만 아니라 아나와도 진정으로 이별하고, 아나의 죽음으로 고여 있었던 과거에서 떠나왔으며, 알프레도의 대성당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한 셈이다. 산타 리타는 그 자체로 대성당이자 세 사람의 연대를 접착하는 편지로 기능한다. Santa Rita는 스페인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수호성인을 일컫는다. Santa가 스페인, 이탈리아, 스웨덴, 영국 등 유럽 전역에서 여성형 명사로 성녀의 의미를 갖고, Rita 또한 널리 여성의 이름으로 쓰인다는 점에서,  또한 Rita는 자연과 인륜을 주관하는 법칙, 모든 자연율과 도덕률을 초월하고 통제하는 근본적인 원리 또는 초월적인 실재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Santa Rita는 이 비극적 사건의 절대적 피해자인 아나를 의미하고, 진실을 상징한다. 나아가 이 사건의 피해자로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마르셀라, 스스로 가족과의 이별을 선택한 리아와 마테오로 산타 리타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으며, 성별과 연령을 떠나 사회의 무책임한 태도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모든 이들, 즉 책임을 상징한다. 알프레도는 자신의 대성당에 산타리타, 부간비야(부겐베리아, Bougainvillea), 리아, 마테오와 같은 이름을 새기겠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그는 자신이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끝내 지켜내지 못했던 모든 아이들의 이름을 대성당에 품음으로써 자신의 책임과 무책임을 영원으로 새긴다. 너의 탓이 아니야. 그러니 울지 말아라.


통계청의 경찰청범죄통계 중 피해자 성별, 연령 통계에 따르면, 살인, 강도, 강간, 강제추행 등 강력범죄의 피해자 중 여성의 비중은 86%다. 이 충격적인 통계의 해석은 여성이 강력범죄에 전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보다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조금 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개편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미 시스템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재를 위한 기본적인 준비는 마쳤음에도 이런 통계가 도출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행위에 제재를 가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사회 구성원이 서로를 보호함으로써 서로 보호받기 위하여, 어른으로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길을 잘못 드는 구성원들 혹은 피해를 입고 있는지도 모르는 피해자들을 위하여, 마땅히 져야 할 책임에 무관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한다. 어쩌면 불특정 다수가 이루는 무지의 장막 안에서 공동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이고 건조한 모델은 책임의 품앗이화일지도 모른다.


아나의 집 뜰에 자홍빛으로, 리아의 동네 공원에 흰색으로 핀 산타 리타를 생각한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수호성인의 의미를 생각한다. 산타 리타의 자홍빛 커다란 꽃잎은 사실 이파리라고 한다. 커다란 이파리 사이에 알아 볼랑 말랑한 아주 작은 꽃이 흰색으로 맺힌다. 종종 인간은 보는 것을 믿고, 믿은 것 외에는 보지 못한다. 니체는 맹목적 믿음은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가끔 어떤 인간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를 맹목적으로 믿음으로써 불편한 진실에서 자유로워지고자 시도한다. 이기(이로울 리 利, 자기 기 己)는 그 마음이 타인을 해할 때 더 이상 자신에게 이롭지 못한 것이 된다. 신념은 그 믿음이 다른 믿음은 틀렸다고 말할 때 더 이상 믿을만하지 못한 것이 된다. 신앙은 그 추앙이 다른 것은 멸시해도 좋다는 합리화의 수단으로 쓰일 때 더 이상 순수하지 못한 것이 된다. 진실은 화려하고 커다란 이파리 사이로 작게 맺힌 수수한 산타 리타와 같다. 가끔 인간은 오랜 믿음을 행위로 옮기고, 익숙하지 않아서 믿지 못하는 것은 행하지 못한다. 어른으로서의 책임은 꽃의 모양으로 익숙하게 눈에 익은 이파리 사이로 생경한 모양으로 맺힌 산타 리타와 같다. 우리에게 필요한 수호성인은 다른 믿음을 존중하는 마음이고, 눈을 가리지 않는 소박한 진실이며, 어른이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책임감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삶을 향해 정열적으로 뻗어나가는 이파리 안에 순수하게 맺힌 무엇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세상이 한치라도 더 나아가길 바란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글을 쓰고 알리고 있다는 이유로 글 뒤에 숨어 나의 책임을 모른 척했던 순간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른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행동에 나섰다가, 후회했던 순간들을 생각한다. 단언컨대 내 삶은 내 책임에 무관심하지 않았던 순간들 덕분에 나아왔다. 내 책임에 등졌던 순간보다 최선을 다했던 순간이 나를 더 곤란하게 했지만, 후회는 덜 남았다. 클럽에서 추행당하고 있는 어린 친구에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양손을 내밀고, 공원에서 남성에게 맞고 있는 여성을 위해 파출소로 뛰고, 창 아래에서 교복 입은 아이들이 벌이는 폭력 행위를 향해 양동이 가득 담은 물을 잔뜩 뿌린 순간 같은. 후에 나를 곤란하게 했던 순간들 덕분에 내 삶은 나아왔다. 내 대성당에는 무엇을 새기고 채울 것인지 생각한다.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 생각한다. 나를 성장하게 한 진짜 어른들에게 진 빚(責)을 생각한다. 나의 대성당에 꾹꾹 마음을 눌러 담아 적는다. 스테인 글라스 너머 태양이 떠나기 싫어 길게 울음 운다. 눈시울이 벌게졌다가 이윽고 까매질 때까지. 텅 빈 대성당의 회당 한가운데에 홀로 누워 흰 벽에 너울진 긴 노을을 내내 지켜본다.

이전 04화 Knowlan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